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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Aug 11. 2023

거기 누구세요?

내 안에 숨은 나 불러내기

"나는 육체적으로 힘을 쓰는 일이라면 뭐든 피하려 들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행복한 삶의 지표로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작가 폴 오스터 '브루클린 풍자극'의 한 대목이다. 화자 네이선 자신의 성향에 대한 설명이지만 이것은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문장이라 부를만하다.


엄마, 주부, 며느리, 마트 직원 등등.


어느 하나 육체노동을 뺀다면 나는 그 작업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엄마로서 아이를 씻기지 않고 잡기 놀이를 해 주지 않으며 놔두고 간 일기장을 학교에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주부로서 뜨거운 불 앞에 서서 한여름 낮 냉면을 삶지 않고 컵 쌓기 놀이처럼 쌓여가는 그릇을 외면한다면.

혼자 사시는 아버님 댁으로 간 며느리가 아침 7시 아침을 차리지 않고 마른 김처럼 잘 건조된 빨래가 부채마냥 흔들려도 그냥 둔다면?

물건을 나르지 않고 먼지를 털지 않으며 흐트러진 상품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그날까지 일하리라, 근무가 이어질 것이라 낙관할 수 있을까? 내 직업은 유지될 수 있기나 한 건가?



그래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성향으로 나는 짜증을 많이 내는 인간 일 수밖에 없는지도.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 많이 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커뮤니티도 찾고 온갖 지식이 열려있는 책 속에서 정보도 구한다. 당연하게도 싫어하는 걸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막장 드라마에서 보듯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이라도 하는 주인공이 아니라면 사랑하니 결혼하고 좋아하니 여행을 가고 먹고 싶은 걸 맛보려 맛집 앞 그 긴 줄도 견디는 거리라. 그렇다면 나는  짜증 내기를 좋아하나 보다.




열 살이나 되었으면서 화장실로 호출하는 아이에게


차 문을 열어 굳이 쓰레기를 밖으로 버리는 운전자에게


마트 문 앞에 서서 물건을 가져오라 명령하는 누군가에게 짜증이 나는 건.




굳이 감정을 쓰고 얼굴에 표정을 붙이지만 먼저 해결하려 들지 않기에 말로만 하는 편한 짜증이라는 해결책을 찾는 거라는 걸. 몸을 일으켜 아이를 보살펴주고 길가에 떨어진 폐비닐을 줍고 무고한 국민을 위험으로 내몰지 말라는 표현을 행동으로 바꾸는 움직임을 '해'보는 거.




좋아하는 에코백을 메고 좋아하는 글쓰기 수업에 가는 중이었다. 가방이 옆구리에 닿는 느낌이 뜨끔 찌릿하다. 몸을 모로 튼다. 솜 잠바를 만들었는데 목둘레로 느껴지던 시침 핀의 날카로운 느낌이랄까?


 "뭐니? 벌레니?" 


얼핏 가방을 뚫고 나온 것은 칼처럼 단면이 날카롭다. 연필을 깎으려 온갖 곳에 두던 450원짜리 도루코 새마을 칼인가 가방을 열어본다. 하나 그 주인공은 작은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켈리그라피용 'G 펜'이었다. 글 쓸 때 필요할까 하여 넣었지만 제 역할을 잊은 그 펜. 그렇게나 뾰족하여 가방까지 뚫고 나온 것이다. 나의 행동'력'은 그 펜처럼 내 속에 있었지만 나는 사용을, 그 효용성을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잊었어도 무뎌지지 않고 어제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준비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쓸 수 있는 잠재력. 고이고이 모셔두었지만 꺼내어 써도 무방한 그 움직임을 이제라도 불러내 볼까.  그리하여 누구도 반기지 않고 나조차 그러고 있는 내가 민망해지는 '짜증'이라는 감정 표현이 아닌, 감정을 받아들인 몸이 해결하도록 기회를, 자율성을 줘 보는 건 어떨지. 하달된 명령은 오류 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놓아두는 거다. 온갖 것을 머리 제 혼자 부여잡고 잘난 체만 하지 않도록.



 나의 표정은 할리우드 배우처럼 미간을 좁히며 감정을 표하고 싶겠으나 관리자로 승격하길. 에코백을 보며 이걸 왜 넣어서는 구멍이나 내느냐 혼자 짜증 내기보다 잠깐의 번거로움을 견뎌보리라. 그리하여 지금 당장 바늘을 가지러 분연히 일어나야겠다. 구멍을 메운 가방 속에 짜증은 고이 구겨 넣어보리라 다짐해 본다.


층간소음을 피해 마트로 도망친 주부의 '을'질 적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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