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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층소화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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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Nov 24. 2023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쓰는 이유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죄송함.

글을 씁니다.


일기는 아닙니다. 누군가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가끔 글에 달리는 댓글이 목적인 적은 있.. 잘 쓰지도 못합니다. 물론 아이 선생님께 <오늘 아이가 아파 학교를 쉬겠습니다>하는 문자도 적기 힘들어하는 지인보다는 문재(文才)입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저의 필력을 인정해 주는 단 한 명 에게는요.

자판 앞에 앉아 글을 적고 있습니다. 뭐 저라고 욕심이 없겠습니까? 좋은 글, 울림이 있는 글로 많은 사람들에게 통찰을 주고 싶습니다. 읽은 사람들의 삶에 사소한 영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내가 쓴 글이 책이 되고 베스트셀러 매대에 놓인다면 어떨까 생각도 합니다. 그렇게 얻은 작가라는 단어가 내 이름처럼 당연하여 낯간지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폐기물 스티커를 사러 간 면사무소에서 들은 내방자 누구에게나 부르는 '선생님'이란 이상한 말처럼.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모'라고 부르는 어느 아이의 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머니'라고 부르는 영업사원의 말처럼 잘못 들은 낱말 같지 않길 바랍니다.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줄 책임을 상상하다 보면 <아냐 그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야> 하게 됩니다. 기껏 누군가보다 몇 년 더 산 경험으로, 어느 부분에서 누구보다 더 겪은 일들로 알게 된 어떤 것들을 글로 적어 아는 척해놓은 글.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어 부끄러워지기 싫습니다. 더 나은 문장을 쓰게 된다고 해도 그건 아직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글을 적는 이유는 있습니다. 첫 회에 밝혔다시피 글을 짓는 분들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잘 쓰기 때문에 "이런! 재능이 넘쳐 문장마저 그냥 흐르는구나. 괜히 인류의 명문장이 헛되이 사라지기 전에 받아 적어 놓아야겠군" 하며 쓰는 게 아닙니다. 써야 할 것이 있어서 쓰는 것입니다. 잘 쓰고 못쓰고는 글쓰기의 필수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쓰고 보면 뱉어놓은 글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놓습니다. 누구를 닮은 것도 같습니다. 그림자처럼 형태가 되어있습니다. 그 속을 한 줄 한 문단씩 적으면서 또 그걸 읽으면서 채워 넣습니다. 무채색 행태 속이 구체화됩니다. 그러면 흐릿하게나마 익숙한 누군가가 보이는 듯합니다. 어떤 표정, 어떤 자세, 어떤 시선을 가진 제가 말입니다.


층간소음에 대해 쓰면서 누군가에게 대리 만족을 주면 어떨까 생각도 했습니다.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공감이 되는 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말 행운이게도 소음인지도 모르고 사는 어느 윗집 분들이 보고 <이럴 수 있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글은 모든 소명을 다했다> 싶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망보다 컸던 것은 저를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저를 유체 이탈로 <보디존>만큼 떨어진 어느 지점에 서서 보고 싶었습니다. 매번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가사를 탕진할 수도 없음입니다. 친구도 없는데 다섯 손가락도 다 필요 없는 그들을 돌아가며 불러내어 제 괴로움을 치료하는 용도로 쓸 수 없음입니다. 잘못도 없는 착한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며 후련해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글을 잘 쓰지도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도 아니겠지만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제 상태를 객관적으로 봐야 했습니다.


저는 자을 선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제 작은 오빠가 그렇게 먼저 가고 보니 <쌍둥이 중 한 아이의 통증을 나머지 아이도 같이 느낀다>는 감정이 이럴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손 내밀 때 곁을 주지 않은 저를 원망도 했지만 그것만이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그 지옥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홀가분한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오빠는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서 있었던 곳은 낭떠러지입니다. 일주일을 굶주린 커다란 호랑이가 팔 하나 뻗을 만큼 다가온 단애 그 앞. 그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당장 살이 찢어지고 뜯어지는 끔찍한 지옥을 겪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몇 초간은 호랑이를 잊을 수 있는 평온할 수 있는 곳인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선택하듯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절로 움직인 것입니다. 몇 초라도 더 살고 싶어서요. 잠시라도 끔찍함을 늦추려고. 고통을 미루고 싶어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까? 저기로 가볼까? 하며 한가하게 선택이나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잔인함이 싫습니다. 그 상황으로 몰리는 것일 뿐.


당장 고통스러우면 이사를 가라든지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족에게조차 모든 마음을 털어놓고 힘듦을 나누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남편도 어느 날 잠깐 털어놓은 저의 고통에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라고 했습니다. 오빠가 가족에게 하지 않았듯이요. 그것이 약간은 두려웠나 봅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놓쳐버린 한 존재에 대한 후회요. 가족에게 고통을 나눠주긴 싫지만 많은 분들에게 A4 한 장만큼의 기분 나쁨은 좀 들어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들어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가 저에게서 약간 거리를 둘 수 있는 수단만이라도 될 테니까요. 그렇게 제가 저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 네 곁에는 내가 있어" 그렇게 말한 저를, 약속을 잊지 않았을 저를 불러봅니다.

오빠가 죽었을 때 제 고통이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공감을 받았던 끔찍하지만 편안했던 기분처럼요. 공감이 주는 큰 효력을요. 갑자기 내 편이 생긴 것만 같던 그 기분이요. 살아 숨 쉬는 제가 저를 읽어줄 수 있는 글쓰기입니다.

저의 아픈 손가락이던 오빠는 때를 놓쳤지만 글 속에 살아있는 제 곁에는 있어줄 수 있습니다. 지금 저의 아픈 손가락은 글로 존재를 드러낸 저입니다. 그런 저를 다독이려 글을 씁니다.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으면 더 좋을 글을 오늘도 씁니다.

실컷 괴로울 때는 적지도 못하다가 많이 나아졌을 때부터 층간 소음일지를 썼습니다. 그것도 내킬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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