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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Dec 06. 2023

그 사건은 일어났다.

A4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로망이 있다. '날씬해지고 싶다. 이뻐지고 싶다. 비싼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와 같은 남들도 인정할만한 꿈 말고. '허물어야 할 흙집 한채 갖고 싶다. 내 몸에 딱 맞는 매트릭스 가죽 트렌치 갖고 싶다. 김민준이가 반갑다 친구야 해주면 좋겠다.' 뭐 이런 나 혼자 '좋을 텐데..' 하는 것 말이다. 버킷리스트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름이 무어가 되었든 남들 앞에 말하면 안 되는 욕망이 있는데.. 그중에도 특별히 말하면 안 되는 특급 비밀. 그건 바로 작업 공간을 갖고 싶다. 다.



누구나 그런 거 아닌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지금 무언가 작업이라 부를만한 작업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작업실. 캬 뭔가 멋짐이 비어져 나온다. 이름부터. 뭘 하길래 작업실까지 마련해 놓고 작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주부인 나를 기준으로 보자면.. 청소를 위해서 작업실을 갖고 싶다. 아니지. 청소는 집 청소를 말함인데 작업 빗자루 청소기 걸레 이런 걸 어디다 두고 작업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빨래? 이것도 아니고. 음식을? 오다 다 엎고 식고. 애들 재우는 작업실. 그건 좋네. 좀 떼놓게..

거창하게 '내가 작가다' 상상을 해보자. 그렇다면 말이 다르지. <김호연의 작업실> 책에 보면 삶과 분리된 공간인 작업실을 구하는 얘기가 많다. 작업한 얘기도 물론 많고. 작업 이외의 것이 사라진 혹은 영감을 주는 공간에 대한 필요. 멋지다. 작업실 갖고 싶다.

여러 작가들이 옷을 짓기 위해 보석을 만드느라 가방을 만드느라 그림 작업을 하기 위해 등등. 각자의 작업을 위해 작업실을 마련하고 일을 하는 모습을 담은 책, 오래전부터 눈여겨봐 왔다. 그냥 부러워서. 천가방은 만들어봤고, 애들 보석 팔찌도 비즈 목걸이도 만들어봤고, 창문에 글라스데코 작업도 해봤고 클레이로 조색해서 햄버거도 만들어봤고 참 많은 작업을 했지만 집에서였다. 나도 왠지 작업실만 있으면 멋짐이 손가락 끝에 조금 묻어날꺼같은데. 작업실 갖고 싶다. 앉아만 있어도 뭔진 몰라도 작업이 될 것만 같다.


오늘은 수요일. 행복한 날이다. 그림은 늘지도 않지만 좋아하는 분들과 얼굴도 보고 곁에 머물 수 있는 어반스케치 동아리 날이다. 마치고 2 차가자, 3 차가자 눈치 보지만 오늘은 1차로 파했다. 밥 먹자 떼쓸 분위기를 놓쳤고. 2차를 놓치면 3차를 못 가니 놓쳤다.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몇 권 빌리고 나온다.

첫째 손가락 골절 서류 떼러 병원 가야 하는데 어제 혼자 갔더니 안 준다. 증명 서류 가져오라 해서 그것도 물어봐야 하고 차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하다. 뭘 안 했는데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는데 뭘 빼먹었을 때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다. 일단 출발한다.


며칠 전 <진주 두르고>에 그리고 적고 할 동네 사진을 찍었다. 가는 길이라 몇 장 더 찍어야겠다 싶다. 집으로 가는 길 중간 정도에 있는 갈전리에 차를 댄다. 이상하리만치 대문만 보면 정신이 혼미하다. 대문 창문 이 놈의 문이 왜 이리 이쁘냐? '요놈도 이쁘고 저놈도 이쁘네' 하며 사진을 찍다 침 좀 뱉을 것처럼 생긴 사자 손잡이 문을 본다. 사람 몸통이라면 국기에 대한 맹세 하려 손 올리는 자리. 종이가 붙어있다. A4 한 장. 뭐라고 적혀있는데. 또 무슨 글자 적힌 거 그냥 못 넘어가니 본다. <본 건물 무료로 사용하 실 분 연락 주세요 010-2345-6789> 뭐라고? 집을 그냥 쓰게 해 준다고? 보자마자 든 생각은 <작업실!> 따뜻하고 추운 작업실.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추운 작업실이 될 작업실. 겉에서 보이는 초췌함은 가난한 작가의 작업실에 더없이 어울리는 몰골이다. 무슨 작업인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돈을 못 버니 가난하고 작업이 볼품없으니 초췌함이 갖춰진다. 그게 아니라도 더운 여름에 마루에 누워 자연 바람 쐬고 겨울에 군불 지펴 고구마 구워 먹을 작업을 상상하다 잠시 웃는다. 당장 동아리방에 작업실 어떠냐 여론을 묻는다. 가능한지 주인과 통화를 해 보란다. 전화해 보니 주인이 편하게 들어가 보란다.

허락도 득했겠다 마음 편하게 보니, 그냥 폐가다. 동아리 회원의 전화도 오고 문자도 오지만 결론은 나 혼자면 모를까 폐가에 사람 모아서 그림, 무리다. 한창 어린 나이라면 고치고 칠하고 의욕적으로 뭐든 하련만 무얼 하든 돈으로 할 수 있으면 하는 거고 돈으로 안 되는 작업이면 못할 나이다. 벌써. 육체를 결론과 바꿀 나이는 좀 소비기한이 넘어가버렸다. 다행이다. ㅎㅎ 몸으로 할 생각 하니 엄두 안 난다. 안 다행인 건 돈이 없다는 것. 나이는 돈으로 결과를 살 때인데 결론적으로 돈은 없다. 나는 부자이고 필요한 것은 없지만 필요 없는걸 가지려니 돈이 없다. 불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나 마나 작업실은 물 건넜다. 물론 다음 기회도 있다. 다음에 작업실로 저렴하기에 흠이 아주 약간만 있다면, 가능도 할 거다.

근데 여기로 이사를 간다면? 지금도 발을 구르고 야단 중인 윗집을 떠나 춥고 더운 이곳으로 이사를 간다면? 겨울에 너무 추워 코가 시리고 여름에 너무 더워 땀띠가 나는 이 집으로 이사를? 이사를 가자고 하면 돈을 떠나서 사람이 살도록 해 놓고 살아야지 하며 새로 집을 짓다시피 할 남편에게 말을 해봐? 아직도 힘들어? 할 것 같아 걱정 끼치기 싫기도 하고.. 작업실이든 집이든 상상만큼 작업이 쉽지 않구나.

혼자서 북도 장구도 친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시켜본다. 나는 참 별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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