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소리들이 나올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 몸에서 착착 나오는 기분을 느끼며 썼다. 잘생길 수도, 세련될 수도, 여유를 가질 수도 없는 글들, 눈 감은('감은 눈'이 아니라 '눈 감은'상태인 게 중요하다) 상태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쌓였다. 쓰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다 비워냈을 땐 허기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들고 기진맥진하여 서 있는 사람. 목소리를 제대로 사용해 글을 쓰고 나면 깨끗한 슬픔이 온다. 그 기분은 참 좋다.
언젠가 글로 나를 뱉어 낸 후 '말랑한 우울함'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가벼운 우울증상이 느껴질지언정 몸은 개운한 것만 같은 기분이요. 그러면서도 정신의 필요였는지 몸의 필요였는지 구분키 어려운 - 잠시 낮잠이라도 자고 싶은 - 노곤함도 같이 밀려왔지요. 그래서, 부엌의자에 앉았다가 식기 세척기에 바치는 시를 썼습니다. 웃자고 쓴 거는 맞습니다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말이 무언인지 몸이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곤 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였지만 오히려 커다란 힘으로 저를 휘어잡는다는 소속감을 느꼈습니다. 힘으로 저를 안았지만 답답하지 않았고 온몸으로 안겼다는 기분이요. 새벽이 주는 공기의 농밀함이 저를 눌러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박연준 작가의 산문에는 이런 글도 나옵니다.
p.43
당신이 첫 책을 쓰고 싶다면 이것만 기억하시라. 스스로를 알아볼 것(자기 글의 음색!), 모르는 채 태어날 것.
책은 세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는, 태어나고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비정형의 무엇이에요. 우리 안에 간직된 채, 피로와 침묵과 느림과 고독을 한탄하는 존재라고 할까요. 하지만 일단 세상에 나오면 그 모든 것이 일거에, 사라져 버리죠. (마르그리트 뒤라스. 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뒤라스의 말> 중에서.
글을 짓는 것에 대한 책도 아니었습니다. 책을 쓰는 것에 대한 책도 아니었지요. 그저 '슬픔을 사랑으로 보듬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책 소개를 보고 잡은 것이었습니다.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습니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 넘쳐나는 책을 읽으려 책방에 서 있는 사람보다 글을 쓰려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 세상이 된 것도 같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잊힐 책에 대한 연민도 물론 있고요. 거기에다 또 물론 내가 쓴 글이 책이 되었을 경우를 상상하였을 때 소비해야 될 종이, 나무에 대한 미안함도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글을 쓴다는 일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 홀로, 나만이 할 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내어놓는 작업의 아득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저 적당히 숨이 죽은 배게의 감촉처럼 제 얼굴을 감싸는 이 기분이 좋은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