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출근하기 전 약 먹는 소리가 들린다. 잘 다녀오라며 다정하게 뽀뽀를 하고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보내준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도 출근이네. 잘 다녀와, 여보"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든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 2023년 12월 31일이다.
일어나 배웅을 하면 좋을 텐데.. 최근에는 도통 본 일도 없는 로코(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처럼 헤어짐을 슬퍼하며 말이다. 설정 배웅도 하고 말이다. 남편은 조용히, 아침에 일어나 가족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출근했다.
마누라의 게으름을 진작에 알아버린 남편은 기대가 없다. 그렇게 원 없이 게으르면서도 또 게으르고 싶은 아침. 그런 아침이 어김없이 변함도 없이 왔다. 두 아이의 방학이라 방학 '첫날' 아니고 '둘째 날의' 아니구나 '셋째 날의' 게으름을 좀 즐기겠습니다. 뻔뻔한 변명을 '속으로도' 조용히 해본다. 잠깐의 각성 후 다시 따뜻한 둘째 품에 안겨 스르르 잠에 빠진다. 변함없는 아침이 새롭도록 좋다.
외부 공기에 열을 빼앗긴 전기장판을 피해 둘째에게 간다. 변함없는 사랑의 온도를 뿜어내는 아이의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36.5와 36.5를 더한 숫자만큼의 편안한 사랑 온도다. 재를 만들지 않는 애정의 온도. 소모시키지 않는 온기. 태우지 않는, 끓이지 않는 안전한 정도의 그것, 애든 물이든. 상대를 지치게 하거나 무기력하게 하는 열기가 아니라 따뜻함을 등에 업고 웃으며 세상으로 나갈 힘을 주는 체의 온. 나른하게 몸이 풀리는 중에도 입은 자율 신경모드로 꼬리가 올라간다. 사랑스럽다. 너의 발가락 냄새까지..
아침부터 시작된 호들갑스러움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가 나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조증 상태에 가깝다. 하고 싶은 걸 했고 갖고 싶은 걸 가졌고 보고 싶은 분을 만났다. 내가 조금 더 자랑스러운 상태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내년에는 꼭 책을 낸 출간 작가 신분으로 다시 찾아뵙고 싶다는 약간은 허황된 꿈마저 꾸게 된다.
책을 꼭 내고 싶다기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니, 어려운 거다. 아직은 공력이 부족함을 누구보다 알기 때문에. 더 정성도 힘도 쏟아야겠다 다짐도 해 본다. 그만큼 좋다. 좋았다. 지금이. 어제가.
갖고 싶은 게 적다. 남편이 생일 선물을 물어온 적이 있다.
"나 금목걸이 하나 갖고 싶은데. 실금반지나.. 그런데 없어도 돼. 지금도 필요한 물건은 아니거든"
'그냥 색이 변하는 장난감 반지 말고 목이 가려워지는 가짜 금목걸이 말고 끼고 샤워를 해도 되는 목걸이가 갖고 싶긴 한데. 그런 거 없이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뭐. 없어서 사는데 지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다고 남은 50년 더 행복할 것 같지도 않다고.'
"없으면 불편해서 선물을 사진 않지. 갖고 싶으면 말해. 사줄게"
'내가 있잖아. 진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슬퍼지거든. 못 가지니까. 갖고 싶다고 말을 못 하는 성격이니까. 속으로만 끙끙 앓으니까. 저런 것 때문에 돈을 쓴다는 죄책감.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욕심을 갖는 내가 한심스럽고..뭐 그런 감정들이 생겨서 혼란스럽고 우울해져. 나 때문에 누군가를 귀찮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노동을 바쳐야 하는 돈을 쓰게 한다는 미안함. 내가 내 마음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딱한 감정이. 그런데 금 목걸이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들진 않아. 그러니 갖고 싶은 게 아니야, 솔직히. 아주 딱 깨 놓고 말해서 말이야'
"갖고 싶으면 말할게. 지금은 그닥..이야. 그건 그렇고 나는 있잖아.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야. 필요한 게 없어. 집 있지 차 있지 남편 있지 애 있지. 부모님 계시지. 소고기 사 먹을 돈 있지. 비싼 커피 사 먹을 돈도 있지. 글 쓸 볼펜 있지. 입고 나갈 옷 있지. 암만 생각해도 필요한 게 없어"
"나는 모든 걸 가진 여자다!"
"푸하하"
근데 솔직한 마음이다. 거짓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누군가 선물을 주고 싶다고 말을 하면 글쎄, 뭘 필요로해야하지? 고민을 한다. 필요하면 필요한 때에 산다. 그때마다. 그게 다이소든 홈플러스든 화방이든. 어제만 해도 롯데마트에 <플레티넘 플레피> 만년필이 4,900원에 행사하길래 바로 샀다. 꼭 필요하진 않은데 "세일 많이 하네?" 하며 장바구니에 넣었다. 온라인 문구점에서 넣었다 뺐다했던 만년필을 지른거다. 어반스케치에 쓰려고, 애들이 선물한, 가성비가 좋아 산 것까지 이미 만년필은 3개나 있기 때문에 '굳이'인데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틈이 없다. '피ㄹ'자까지만 떠올라도 구한다. '필요하다'는 단어를 다 만들 때까지도 기다릴 필요 없이 말이다. 언제나 모든 걸 가지고 산다. 비울 필요가 있을 만큼.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 작은 소망이 있었다. 가고 싶었던 작은 책방이 있다. 벼르고 벼르다 일로 간 김에 어제 드디어 갈 수 있었다. 책도 사고 커피도 사 마시고 기념품도 샀다.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고는 했지만, 순간순간 균형을 맞추려 하기에 하는 행동이고 생각일 거다. 그냥 기분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필요한 지 잘 판단하려는 행동. 하지만 나는 원래 무척이나 즉흥적이고 기분과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인간이다. 그러니 순식간에 갖고 싶은 것이 생기고 그걸 못 가져 슬플 때도 많을 거다.
마시지도 못하던 커피를 그냥 기분 낸다고 사고는 했으니까. 그러다 이젠 커피 한잔은 그 자리에서 다 마실 수 있을 만큼 커피가 늘었다. 그만큼 자주 많이 즉흥적이다, 나는. 오늘은 기분이니 비싼 커피 한잔 할까? 하며 발길 따라 행동했다.
필요에 의한 것인지 정신을 부여잡고 산 훈련덕인지 지금은 즉흥적인 기분에 흔들리는 것도 많이 적어졌다. 그럼에도 갖고 싶었다. 의미 있는 곳에 온 기념을 남겨 갖고 가고 싶었다. 집에 필요한 것도 아니고 리셀해서 돈이 될 물건도 아니지만 내게만 의미 있는 물건에 욕심이 났다. 남편이 "컵 사줄까?" 물었을 때 단번에 "응"이라고 말했다. 이 천 원 더 싼 저 컵으로 살까? 잠시 고민했지만 가격 생각하지 않고 가장 갖고 싶은 물건으로 골랐다. 다들 한 두 개씩은 있는 거 같은 커피계의 디올텀블러, 스타벅스 컵은 욕심이 안 나지만 여기 책방 이름이 찍힌 이 컵은 갖고 싶었다.
처음이다. 기분따라 갖고 싶은 것은 항상 있었고 돈에 맞추려 결국은 차선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만족에는 가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지점까지만 하던 선택을 끝까지 밀었다.
전에는그냥 불만이었고 불평이 일상이었다. 마음속 빈 곳을 물건으로 채우려고도 한 것 같다. 그래서 더 욕망과 싸웠던 게 아닐까 싶다. 무언가 갖고 싶어진다는 건 그래서 더 우울해지는 일이었다.
없다고 불편하지도 눈에 어른거려 후회되지도 않았겠지만 감정에 충실해봤다. 이상하지만 무언가 해 낸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내 목소리에 내 감정을 실어 입 밖으로 꺼낸 일. 이젠 감정에 흔들려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즉흥적으로 굴어도 적당히 균형에 맞아지는 삶.
이제야 불혹을 맞는지 모르겠다. 기분 내키는 대로 적당히 즉흥적이어도 흔들리는 거라곤 기분좋게 움직이는 머리카락 정도라니.. 올해 또 행복하게 마무리 해 본다.
올 해 행복한 글쓰기는 이렇게 끝내본다.
더 싼 걸 살 수도 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컵을 샀다. 스타벅스 컵 하나 없지만 내겐 평산책방 컵이 있다. 훨씬 좋다. 산 김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밀크티 한 잔.
<나가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는 미움을 받는 사람이더라도 관계없다.
그들은 내가 아니니.
사람은 다이아몬드와도 같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수 만 가지 얼굴이 된다.
수많은 색을 낸다.
내가 보는 색이 전부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다.
내가 보는 색을 남에게 보여주기도 쉽지 않다.
그저 내가 본모습을 내가 간직하며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 눈에 행복이 보이니 행복을 보며 행복하면 되는 거다.
책방에 계신 그분도 내게 그러하다.
<마치며>
모든 작가님들은 훌륭하고 대단하십니다.
그럼에도 제게 감동을 주고 좋은 글 주시는 글벗 작가님들께 내년도 부탁드린다는 말씀드립니다. 내년도 글테기없이 글 써주십시오. 저도 지금처럼 별거 없는 글쓰기 쭈욱 하겠습니다. 작가님들 덕에 행복했습니다. 올 한 해는 정말 선물 같았습니다.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