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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Feb 02. 2024

불안

버림받을 자유

어머니는 저를 버리고 싶어 하셨어요.


평소에는 말 거는 것도 성가셔하시면서 당신 기분이 조금 괜찮으면 이런 말씀을 뱉으셨죠. 즐거운 농담이나 되는듯이요. "너를 지우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한사코 안 된다고 하시더라. 너는 못 태어날뻔했어." 어린 마음에 한 번만 하셨어도 각인이 될 내용일 거에요. 우스운 건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꼭 해야 할말인데 잊을뻔했다는 듯이 하셨다는 거죠. 그 말을 들을 자식 속이 어떻게 곪을지엔 관심도 없으셨어요. 누군가를 비웃을 때만 즐거우셨던 어머니가 행복해하시며 했던 말씀이니까요. 그 말이 뜻하는 의미는 정확히 몰라도 어머니의 말투와 표정에서 이미 의미는 온전히 전달되더군요. 내상이 컸답니다. 이것 말고도 많지만, 존재부터 부정된 마당에 더 많은 말이 필요할까 싶어요. (어린 딸에게 걸핏하면 냄새가 난다느니 공부 안 한다고 혼낸 적은 없으면서 방을 안 닦았다고 때린다든지 한 일은 넣어둘게요.)


생일이 빠른 제가 3살 정도였을 거에요. 구멍가게도 모자라 차리기만 하면 돈을 번다는 소리에 식당까지 여셨을 때에요. 두 분은 제가 자는 틈에 문을 잠가두고 식당으로 가셨죠. 일어나서 가게로 나가보니, 빈지문(한 짝씩 끼웠다 떼었다하게 된 문ㅡ반은 유리가 끼워진) 바깥으로 해가 비치고 있었어요. 그와 반대로 구멍가게의 음습한 어둠은 무서움을 느끼게 할 만했죠. 그런데 신기하죠.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가게가요. 그 모든 환경을 뚫고 들어온 감정은 "올 것이 왔다. 드디어 버림받았구나. 다행이다."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 공간에서는 저만 있었으니, 누군가 사진으로 설명을 해 준 것도 상황을 이해시켜 준 것도 아닌 제 기억인 건 맞을 거에요. 그 환하던, 나갈 수 없는 공간에서 들어오던 빛이 기억 속에 생생한 걸 보면요. 그때부터 우울증을 겪었다면 좀 비약이 심하죠? 하지만 어린 기억을 짚어보면 피하고 싶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잠을 잔 건 맞아요. 그날도 버림았다는 당연한 결말을 느낀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으니까요. 뭘 먹은 기억도 없고요.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해요. 기분이 좋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잠을 자요. 먹지도 않고요.


그때 이후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원래도 없던 응석이지만 더욱 부리지도 못하게 되었을 거에요. 값어치 없는, 언젠간 버려질 나라는 하찮은 존재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참, 말이 되지 않아 보였거든요. 귀염받고 사랑받을, 한창 이쁠 나이에 버림받은 기억은 나 자신을 '못생겼다'와 동일시 하는 결과로 나타났어요. 지금도 '못났다' 병이 불쑥불쑥 나오지만, 가끔 제정신이 아닐 때는 '나도 가끔 이뻐보인다.' 는 생각도 들고 뭐 그렇..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기분은 결계를 치고 살던 제 마음속이 연약해지는 지점이 되곤 해요. 아무것도 아닌 낱말에도 눈물을 쏟게 만드는 말랑함을 만듭니다. 아파서 앓고 있었는데 '엄마'로 대변되는 따스한 존재에 눈물이 터지는 상황처럼요. 참고 있던 어떤 감정이 둑을 넘어 흐르게 되는 것 말이에요. 표정 없고 감정 없이 살던 제게 웃음도 기쁨도 슬픔마저 가볍게 꺼낼 수 있게 소속감을 주셔서 고마워요.


남편은 제 속에 있던 원래 '나'가 드러나는 거라고 얘기를 해요. 정말 그럴까요? 기쁨도 슬픔도 짓궂음도 떠들고 다니는 지금의 제가, 진짜 저일까요? 수많은'나' 중에 감춰져 있던 자아가 드러나는 거라도 말갛게 닦인 얼굴로 당장의 감정을 표현하는 제가 좋아요. 집에 가서 이불을 차며 후회할지라도요. 언젠가 버려질 테니 '마음을 주지 않을 테야' 하고 살던 때보다 눈물도 웃음도 많아진 지금이 귀찮긴 하지만 행복하니까요. 브런치에서 구독하는, 구독해 주시는 작가님들 글을 읽자마자 그냥 눈물부터 나는 고장난 형태의 감정 상태지만 이런 부드러움이 기뻐요. 부드러울 수 있다는 건 강함이 속에 있어야 가능한 걸 알 나이니까요. 버림받지 않으려 관계를 맺지 않고 깨지지 않기 위해 강한척하며 살던 피곤하던 생활이 풀린듯해요. 2차로 소고깃집 회식을 갔는데 벨트를 살짝 풀었을 때의 후련함, 든든함, 할만하겠다는 당당함이 드는 때처럼요. 미안해요. 예가 소고기에 맞지 않았지요. 저렴했네요.


그런데 고백하자면 며칠 전에도 버려졌다는 감정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어요. 구독해 주시는 작가님이 떠났을 때예요. 감정이 추슬러 지지 않더라니까요. 저도 놀랐어요. 많이 컸다고 생각한 감정이 아직도 '어림'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요. 다행인 건지 이것도 습관인지. 또 한 작가님이 제 곁에서 원래 자리로 가셨는데 이번에는 지난번보다는 담담했어요. 지난번에는 운전이 안 되더라니까요. 혼났어요. 흔들리는 제 마음 때문에요. 제가 말랑해져 있기 때문일 거예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증거 일거에요.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작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난 버림받고 잊혀지고 헤어지는것에 서투르다.


매년이다시피 전학하며 누군가와 다투고 화해하고 가까워지기 위해 겪어야 할 많은 감정을 편하게도(?) 패스하고 자라나 버린 작가. 김영하 작가는 그렇게도 쉬이 잊히고 헤어지면서도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서투름을 고백했어요. 글을 보며 작가님만큼의 감정은 아니지만 이해가 되었어요. 버려지지 않기 위해 관계를 맺지 않고 살던 저니까요. 헤어지고 나서 홀가분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살던 저니까요. 원래 자리로 잘 돌아왔다는 안도감. 나는 어차피 버려질 운명이었다는 파괴적인 생각들을 안고 살아온 저 말이에요. 이제 이별이 싫어요. 헤어짐을 배워야 하지만 서툴러서 더 힘들어요. 그럼에도 키워볼게요. 아직 여린 연둣빛의 제 감정을요.


오십에는 어른이고 싶으니까요.


오늘도 언니에게 편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눈물이 난답니다. 고마워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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