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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Feb 06. 2024

사모님 책이 왔어요

이걸 열어 말어?

이 말이 유튜브에 처음 통용될 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Unboxing'

요즘 배운(?) 사람들은 컴퓨터, 이어폰, 발코니, 캐리어 이런 단어처럼 없어서 들어온 말이 아닌 것도 영어로 한다. 

상자 개봉. 상자 열기.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 '눈'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은 것이나 열대 우림 지역에 '녹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은 것처럼 택배가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보다 흔해진 사회라 그런가. 미묘하게 다른 말과 언어로 풍부하게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지도 모르지. 언박싱이라... 단어가 주는 말맛이 이쁘지는 않다.


오늘은 나도 오래된 '최근 단어' 한번 써봐야겠다.

언박싱.


역시 별로다.

개봉박두. 음. 상자까! 열어보자, 상자!

방통대에서 택배가 왔다. 방통대가 아니라 방통대 출판사라고 해야 하나? 한 학기 책이 담긴 9만 원 정도 값을 낸 물건. 말은 똑바로 해야지. 89,200원어치다. 학비랑 한 학기 교재비까지 다해서 40만 원 정도. 여전히 방통대는 싸다. 싸면 다이소 다이소는.. 그만해라.


집에는 등이 흔들리고 책장이 춤을 추는 지진 상태(층간소음 때문에)라 밖으로 돌면서 이것저것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 수업에 갔더니 글쓰기 수업이었고(글을 쓰겠다며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그림을 그리겠다며 동아리를 만들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 보니 일을 벌이며 드러나는 성과보다는 일을 만드는 행동 자체에 재미를 붙인 것처럼 보인다. 아. 아니지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긴다?인가. 과정이 그 과정이 아닌... 에헴.

일을 벌이다 벌이다 이젠 대학까지 등록했다. 조기축구를 하고 커트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지적 사고 과정을 통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있어서다.


매일이다시피 글을 쓰는데 누구도 쓸 수 없는 나만의 글을 쓰고 있다. 가볍다. 웃기고 가볍다. 하찮고 가볍다. 다방면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쓰는데 가볍다. 이렇듯 내 글은 가볍다. 책은 많이 읽는데 로맨스 소설보다 조금 더 두꺼운 소설, 흥미 위주의 글들만 읽으니 지적 성숙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모이는 속도가 느리다. 지적 사고를 통한 글쓰기가 나올만한 우물이... 한 개들이 두부곽 정도인 거다. 속이 뻔히 보인다.

대학 공부를 한다고 지적 성장이 얼마나 이루어질까마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강제력도 있다. 어쩐다고 요즘은 시키지 않은 매일 글쓰기 매일 그림 그리기 같은 성실이 필요한 일을 꾸준히는 하지만 내가 알지. 나는 원래 태생적으로 그렇게 성실하지 않은 인간이다. 오죽하면 우리 집 가훈이 <성실>이었을까? (어릴 때는 저런 대단하지 않은 단어를 왜 가훈으로 쓰는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나를 닮아. 아니 나는 아버지를 닮아 '성실과'는 아니다. 즉흥적이고 예술적(?)이고 재미적이다. 한 마디로 좀 엉뚱하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종인 거다. 그러니 이런 강제력은 최근의 '성실처럼 보이는 일들을 잠깐' 유지하고 있는 나에게는 꼭 필요한 덕목인 거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점. 기분이 그러고 싶지 않으면 강제력이 개미 눈꼽만큼도 효과를 못 본다는 점은 있다. 중도 포기. 중퇴자가 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크게. 그러니 기도해 본다. '나는 예전에 그만큼 기분파였다'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말이다.

입학식도 없는 입학을 하기까지 4주 정도 남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연세에도 공부하시는 분이 많지만 나도 새파랗게 어리지는 않다. 지금부터 공부를 슬슬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시동거는 데 시간 걸리는 중고 뇌니까. 공부로 다져진 뇌도 아니니까 말이다. 자 그러면 또 벌여놓은 일 얼렁뚱땅 시작해 볼까? (이럴 때 영화에서 보면 손가락 우두둑 소리 내면서 일어나고 그러던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그럼에도 상자는 못 버리겠다. 반품 가능성도 있으니까. 언박싱의 반대는 뭐라고 하지? 박싱인가? 짐 싸?아니다. 그런 단어 없다치자. 2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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