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필요한 시간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by 노사임당

우리 슈퍼에는 매일 매력적인 가격으로 손님을 유혹하는 상품이 있다. 일명 밴드상품.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찾으러 와야 하는 조금은 귀찮지만 저렴하여 뿌리칠 수 없는 호객 물건.



손님이 어제 가져가지 못한 밴드 물건을 사러 오셨다. 달걀 30개, 한 판이 6,480원. 얼마 전 밴드 상품인 초란은 두 판에 9,900원이었는데 판란의 알이 커서인지 그 사이 가격이 소폭 오른 건지는 모르겠다. 그걸 사고는 더 살 것이 있으려나 여유롭게 지켜보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다른 장은 보지 않고 오로지 달걀만 산다. 물건을 계산하고는 종량제 비닐이나 빈 상자가 아닌 천을 꺼낸다.


넓고 네모난 그 물건은 촘촘하게 틀을 짜서 만든 연한 줄무늬. 한 줄은 비단, 다음 줄은 망사. 7cm 간격의 '피클 그린'과 '모스 그린'이 번갈아 나오는 매력적인 색에 본래는 스카프로 태어난 듯 보이는 보자기. 거기에 달걀을 싸니 원래 포장된 선물용 물건인 듯 찰떡같다. 처음에는 색감이 정말 예뻐서 쳐다봤다. 얼굴과 어울리진 않아 도전하지 않지만 초록계열을 좋아하다 보니 눈에 띄면 은근히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런데, 그 초록 보자기는 알파벳을 붙이고 있었는데 그 스펠링이 채널. 샤넬이다. 샤넬에 무심하게 달걀을 싸서는 6,480원을 쓱 긋고 나간다. 샤넬에 할인 한 물건을 정성껏 싸서 나가다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흔히 명품이라고 하는 고가의 해외브랜드는 없었고 사모님으로 대접받으려는 눈빛도 쏘지 않았는데 '저 보자기가 뭔지 모르는 건가? 그래서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건으로 쓰고 있는 건가?' 싶다가 생각이 며칠 전으로 흘렀다. 콩나물을 무심히 주고 가셨던 어른 손님으로.


밭 일을 하고는 막걸리를 한 두 병 사러 오시는 80대 어머님 손님이 계시다. 밭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일도 가능하게 전화기며 돈 몇 푼 넣고 다니는 미니 숄더백을 달랑달랑 들고 오신다. 막걸리를 계산대에 척 하니 올리고는 천이 너덜너덜해진 숄더백을 열어 지갑을 꺼내신다. 그러면 마젠타 색 국내 고가 브랜드 지갑이 나온다. 그 통통한 놈을 열어 돈을 대충 꺼내 값을 치른다.


어느 날은 뚱뚱한 2,500원짜리 금곡막걸리를 사러 오셨는데, 모자를 쓰고 계시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나는 유심히 보는 편인데 모자가, 밭에 가는 할머니의 모자. 그 모자가 221,000원짜리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잔뜩 꾸민 듯 쓰는 모자가 아니라 엄마들이 아이들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서 쓰는 모자. 호주 브랜드지만 <미국 센트럴 파크에 유모를 시켜 애를 나가 놀게 시키는 그런 엄마들이> 개 산책 시키면서 잠깐 쓰고 다니는 용도로 쓸 것 같은. 그러니까 용도는 화장도 안 하고 애 데리고 유치원 데려다줄 때 쓰는 모잔데 가격은 백화점에 파는 원피스 가격정도 하는 그런 모자. <내니 다이어리>에 나오는 X의 와이프가 쓸만한 그 모자를 밭에 가시는 할머니가 다 떨어진 천 숄더백과 매치시켜 착장을 하고 오신 거다.


그 마젠타색 예쁜 지갑에 입을 대면(입에 올린다는 뜻) 손님은 자랑을 2% 담아 말씀하신다.

"응 며느리가 사 주드라."

다른 날.

"모자가 비싼 건데? 이쁜데요?"

하면 또 2%의 자랑끼만 담아 말씀하신다.

"응 그거 그렇다더라"

어찌나 어른이신지 호들갑도 없이 슬쩍 덤 끼우듯 자식 자랑을 넣으신다.


어머님 생신 선물로 뭘 살까 고민하면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밭에서 일만 하시고 기껏 일 안 하시면서 가는 곳도 읍이거나 결혼식이 다인데. 백화점 브랜드에서 비싸고 호화로운 가방이니 스카프니 구두가 필요할까 생각했던 '짧은 배려심'의 내가 떠올랐다.

그래 그런 거구나. 그게 얼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며느라기나 딸의 진심이 표현할 곳 없이 떠다니지 않게 비싸고 본래의 쓸모가 그 값어치를 못 따라갈지는 몰라도 그 커다란 마음이 담긴 선물이겠구나. 누군가 그 값을 알아봐 준다면 은근스럽게 자랑도 해볼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한. 그 20만 원이 넘는 모자를 쓸 사람은 애 데리고 놀이터에 거의 나가지도 않는 내가 아니라 매일 밭에 나가는 어머님 손님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 물건의 주인은 값이 얼마인지만 관심 있는 내가 아니라 값보다 쓸모를 더 잘 아시는 분인, 물건을 물건으로 쓰시는 주인의 품에 길을 잘 찾은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