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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l 16. 2022

넘어져본 사람만이 넘어지지 않는 법을 안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없는 것보다 차라리 많은 게 더 낫겠지!" 이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맞는 말도 아니다. 만약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많이 받게 되었다면, 이것은 정말 좋은 것일까?






주말을 맞아 타지에서 일하는 친구가 오랜만에 집으로 놀러 왔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 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그동안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직장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말해주었다.



친구가 내게 말해준 건, 함께 일하는 직장 상사의 고민이었다. 그분에겐 20대 초반의 따님이 한 분 있는데,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녀가 원하는 것의 불일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분은 어렸을 적 가난했던 집안 환경으로 인해, 자신이 원했던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살면서 차마 말하기 힘든 일을 여럿 겪어야만 했다. 결국 남들이 보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해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지원을 했고, 지금까지 직장 생활을 이어오고 계셨다.



'공부'가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분은, 자식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안정적이고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공직에 몸을 담길 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삶을 살길 원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자식이 편안한 삶을 살길 바라는 부모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거부하는 딸. 양쪽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어느 쪽에도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을 고르라면 나는 그분의 따님이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부모의 기대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나중에 겪는 후폭풍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20대까지 나는 '말 잘 듣고 착한 자식'이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크게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내가 무언가 하기를 원할 때도 큰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딱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흔쾌히 하진 않았다. 특히 어머니와의 갈등이 아주 많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부딪혔던 문제는 바로 '대인관계'였다. 내향적인 성향의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외향적인 성향이셨기에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나를 항상 걱정하셨다.



내가 똘똘하고 야무지다기보단, 느긋하고 무던한 성격이었던 것도 어머니의 걱정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셨다. 혹여나 아들이 다칠까 봐, 실수할까 봐, 다른 사람에게 욕먹을까 봐 자식의 결정에 조언을 더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나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다. 때론 불만족스럽기도 했지만, 나를 생각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스스로 내린 결정을 뒤엎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연애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부모님에게 나는 여전히 '챙겨줘야만 하는 부족한 아이'일 뿐이었다. 설거지를 하든, 방청소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기준에서 부족하면 어김없이 조언이 날아왔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선 하나의 물음이 들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



그때부터 조금씩 부모님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그것은 부모님의 말이 틀렸고, 내 말이 맞다는 걸 입증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내가 내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거처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선택한 길이 큰 고통과 아픔을 겪는 것이라도, 내 의지로 그 길을 걷는 경험이 필요했다. 그렇게 조금씩 부모님과 정신적인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올해는 집을 나오면서 육체적인 거리까지 멀어졌고, 현재는 온전히 내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때로는 과할 정도로 그 사람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배려이자, 사랑이다.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믿을 줄 알아야 한다. 자꾸만 넘어지는 상대가 걱정되어, 항상 그 사람의 옆에 붙어있는 모습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당신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상대는 이미 '나라는 존재'에 익숙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혼자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돼버렸다. 상대를 무능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상대가 당신 없이는 걸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부모님에게 바란 건,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옆에 있어주길 바란 게 아니었다. 때로는 넘어지더라도, "괜찮아. 넘어지면 어때."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아예 걸을 수 없을 땐 어느 정도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 후에도, 옆에서 계속 팔을 잡고 걷는 법을 가르쳐주는 건 오히려 비효율적이며 불편한 행동이다.



넘어져본 사람만이 넘어지지 않는 법을 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매번 올바른 길만 걸을 순 없다. 실수는 말 그대로 실수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실수를 하지 말라고 매번 주의를 주는 사람보다, 가끔은 실수해도 괜찮다며 넘어가는 사람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응원이나 도움 따위가 아니다. 지나친 배려가 아닌 기본적인 배려가 존재하고, 그 아래에 상대에 대한 '믿음'이 기반이 된 사랑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현재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떤 사랑을 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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