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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Aug 13. 2022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나도, 당신도.


당신에겐 '결과'와 '과정'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나는 한때 '과정'이 '결과'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결과'없는 '과정'이란, 스스로 알아주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 또한 과정보다 결과에 대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의미한 결과를 내야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이런 인식이 강해질수록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도 존재한다. 배트맨의 존재로 인해 고담시에 더욱 강한 빌런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결과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대두되는 문제란 도대체 뭘까. 바로 '실수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다. 오늘 글에선 '실수'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여러 SNS 매체의 등장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정보들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나 괴롭힘, 고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나 각종 범죄들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예전이라면 쉬쉬하며 넘어가거나, 상층부의 압박으로 묻혀버렸을 문제들도 쉽게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이로 인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는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막강한 힘은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하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의 과거 신상을 낱낱이 파헤친 뒤에 사회적인 매장을 시키려 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처음 시작한 건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쟤는 그럴 것 같더라'가 어느 순간 '그랬다더라'로 바뀌고, 며칠이 지나면 '그랬다'는 확신에 찬 말이 된다. 거기에 더해 '누군가 보았다'라는 그럴싸한 말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으면, 자기만의 '가시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맞닿은 안쪽은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바깥쪽은 조금만 스쳐도 피가 날 것 같은 날카로운 수백 개의 가시가 박혀 있는 그런 망토 말이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지',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피해 주면 안 되지', '생각하고 행동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부류의 사람들. 똑같은 실수임에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실수'이고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헷갈린다.



실수로 깬 접시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세제가 잔뜩 묻은 접시를 물에 헹구기 위해 집어 들었다가, 미끄러져 접시가 산산조각 난다. 그걸 본 상급자가 말한다. "안 깨지게 조심해야지!" 며칠 뒤, 이번엔 상급자가 설거지를 하다 실수로 접시를 깨뜨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 뒤 빠르게 깨진 접시들을 치운다. 그러다 며칠 전 접시를 깬 자신의 후임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상급자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낸다. "뭘 보는 거야? 노닥거릴 만큼 시간이 남아도나 본데 얼른 밖에 나가서 청소해!" 후임이 나가자, 그는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설거지를 한다.



나는 당신도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일을 겪거나,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실수임에도 결과는 전혀 달랐던 적 말이다. 물론 덤벙거리는 사람일수록 좀 더 실수를 많이 저지르기도 한다. 개인차에 따라 실수를 저지르는 횟수는 분명 다를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실수는 그저 실수'일뿐이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러 실수하지 않는다. 출근 시간에 일부러 지각하려고 하거나, 고의적으로 책상을 더럽게 관리하거나, 일부러 물건을 바닥에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들은 종종 우리에게 일어난다. 그것이 실수인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불가항력적인 무언가가 개입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것. 보통 그런 것들을 통틀어, 우리는 '실수'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럼 왜 누구는 실수를 하고, 누구는 실수를 하지 않나요?" 나는 이렇게 말한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그 사람이 실수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라고. 앞서 말했듯, 실수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대비를 해서 실수할 확률을 줄일 순 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실수는 항상 일어났고, 그로 인해 역사가 달라지기도 했다.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지식인들이 존재했으나, 크고 작은 실수는 항상 있었다.  



우리는 실수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수로 인해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다. 과거의 실수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하기 전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원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 글은 실수를 장려하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실수하는 걸 원치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수를 한다. 맥주를 꺼낸 뒤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는다. 쓰레기통이 가득 찼음에도 수거하는 날에 내놓지 않는다. 퇴근 후 사기로 마음먹었던 물건을 깜박한 채 집에 들어온다. 누군가의 실수를 보며 세상이 당장이라도 망할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당신은 결단코 실수 따윈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가? 당신이 실수하지 않는 이유가, 당신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어서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다만 당신의 원만한 대인관계에 대해선 약간의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농담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실수에 대해 조금은 더 너그럽게 반응하길 바란다. 중요도에 따라 실수에 대한 처벌은 당연히 달라야 하겠지만, 별 것 아닌 일에도 '별 것처럼' 대하지 않길 바란다. 방이 또래에 비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악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 방 주인의 더러움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행동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나도, 당신도 말이다. 약간의 이해심이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건조한 이 세상이 조금은 촉촉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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