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조언을 하기도, 듣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조언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예 조언을 안 하겠다 단언할 순 없지만, 예전에 비해 대화에서 조언이나 충고의 비중을 많이 줄였다. 오늘 글에선 내가 조언을 하지 않게 된 이유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내가 조언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걱정되는 마음에 내가 했던 말들이 상대방에게 닿지 않았고, 우려했던 결과가 그대로 나온 적이 많았다. 처음엔 그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 왜 저렇게 하지?'
심지어 나는 조언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성인이라면 어련히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주로 조언을 했던 사람들은 내게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몇 번 공감을 해주다가, 같은 문제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애잔함과 답답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래서 조언을 했다. 그들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그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살면서 우리는 여러 일들을 겪는다. 그와 동시에 그런 일 때문에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낀다. 인간은 똑똑한 동시에, 바보 같은 존재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자신의 몸을 던지곤 한다. 그로 인해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 힘듦이 어느 정도인지를 본인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곤 한다. 힘들지 않기 위해, 보다 덜 힘들기 위해서 말이다.
'조언을 구한다'는 건, 자신의 의지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자신이 먼저 타인에게 질문을 해놓고, 정작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조언을 듣고도 본인 마음대로 행동한 뒤에, 나중에 상대를 찾아가 '왜 그때 자신을 말리지 않았냐'며 따지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조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이 필요한 것뿐이다.
지난번 유튜브 촬영을 했을 때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기분 좋은 배려와 기분 나쁜 배려 두 가지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조언은 기분 나쁜 배려에 속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데,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이면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치우치곤 한다. 그럴 때 타인에게 듣는 조언은 기분 나쁘고 아니꼽게 들리기도 한다. '네가 뭘 안다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돌이켜보면 나 또한 그랬다. 상황을 어떻게든 내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하거나,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럴 때 가까운 사람들의 조언은, 내가 부정하고 감추고 싶던 곳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바로 '진실'이라는 것 말이다.
조언의 순기능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조언에 대한 준비'가 갖춰졌냐는 것이다. 조언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조언을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준비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떳떳할 수 있냐는 것이다. 하루를 부지런히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게임과 술 등 자극적인 것에 빠져 매일을 산다면 누가 그것을 조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이 조언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그 조언이 반드시 옳음을 의미하거나, 정당화될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타인에게 조언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자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조언을 듣는 사람이 해야 할 준비는,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인내의 태도'이다. 진실이란 뚜렷해 보이지만, 사실 그 어떤 것보다 모호하고 불명확하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실이라는 것이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진실을 부정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언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의 신념이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할 수도 있고, 일상 속 세세한 것들까지 바꿔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시에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들로 인해 나는 조언을 그만하기로 했다. 하지도, 듣지도 않고 살기로 결정했다. 다만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겐 다르다. 나 또한 관련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내 생각을 말하는 부분도 있다. 결국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때가, 진정한 '조언'이 된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까지 타인에게 자신조차 하지 못한 말들을 하며 살진 않았는가. 아니면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진 않았는가.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객관화만이 좀 더 성숙한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