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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Nov 09. 2022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매년 찾아오는 그날, 생일. 사람마다 태어난 날에 두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나는 생일에 크게 의미를 두진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조금씩 생일이라는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생일에 축하받는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꽤나 낯간지러운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것 같다(물론 지금도 그런 편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축하를 받거나 칭찬을 들으면, 괜히 몸이 배배 꼬이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픈 기분이 들곤 했다. 그중 가장 컸던 것을 떠올려보면 생일 축하였던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게 있어 생일이란, 지나가는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일 뿐이었다. 누군가 내게 "곧 생일이네?"라는 말을 건네더라도 "어, 그렇지."라는 식으로만 답하곤 했다. 생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영혼 없는 축하를 받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나 스스로도 생일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건, 나에게 있어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그저 '태어난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축하를 받는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 같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내가 생일에 축하받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가 내 삶에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을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도 아닌 그저 '하루를 보낸다'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의 축하를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무미건조했던 20대를 보낸 후, 30대가 된 후에야 조금씩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담일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화하는 방법이나 요령을 터득했고, 모임 활동 또한 병행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과 조금씩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생일을 맞이했다. 가족 또는 혼자 보내는 것 외에, 거의 몇 년 만에 다른 사람들과 생일을 함께 보냈던 것 같다. 11월이라 바깥이 꽤나 쌀쌀했는데도, 코끝이 빨개진 상태로 마치 자신의 생일처럼 함박웃음을 지은 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다. 카페에서 생일 축하를 받고 나서, 근처 술집으로 이동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1년 후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작년에 내 생일을 축하해줬던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었고, 한 해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 또한 더욱 늘어났다. 생일날 만나 직접 축하를 해주는 사람, 메신저를 통해 커피와 같은 선물을 보내주는 사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 등등 각자만의 방식으로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이제야 조금은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막연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022년이 되었다. 생각만 하던 독립을 하고, 내 삶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일을 하게 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새로운 무언가가 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매일이 새로웠고 몇 년 만에 떠난 가족여행과 생애 첫 유튜브 촬영 등은 많은 것들을 일깨워주었다. 가족에 대한 의미, 내 삶에 대한 책임감, 건강의 소중함, 새로운 분야의 도전 등등. 그것들로 인해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혼자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난주에 34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날도 다른 날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무사히 출근을 하고 오전을 바쁘게 보낸 뒤, 점심시간이 되어 먹을 것을 사러 가는데 메신저에서 알림이 떴다.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 한 분이 선물을 보내신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루가 끝날 때까지 불규칙적인 알림과 메시지가 이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축하뿐만 아니라, 매년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 또한 '언제 볼 거냐'며 약속을 잡자는 메시지도 받았다. 도대체 내 삶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솔직히 예나 지금이나, 나 스스로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만족할만한 부를 가지지 못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며, 체력 또한 유지하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가장 달라졌다고 체감하는 한 가지를 꼽자면 "선택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완벽하고 싶고, 실수하고 싶지 않아 하고,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 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달라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두에게 잘하려 노력했지만, 그러한 내 노력이 당연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려놓았다. 많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신경 썼지만, 마치 자신이 우위에 서 있는 양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떠나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곁을 채웠다.


  




비록 생일은 지났지만, 오늘도 뒤늦은 생일 축하를 받았다. 초 하나가 켜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친한 사람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축하를 받는 나를 찍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동영상을 재생하자, 사람들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무언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야 누군가의 축하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나름 잘 살고 있구나'



단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축하를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축하해주는 사람이 적으면 어떤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한다면, 수의 많고 적음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당신이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놓여있더라도 당신의 곁에 남아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인가? 아니면 당신의 처지가 나빠진다면 연락조차 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인가? 평소 연락 한 통 없던 사람들이 생일이랍시고 건네는 축하 메시지 수십 통과, 내가 어떤 상황이든 신경 써주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 단 몇 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남을 스스로 체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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