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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l 28. 2023

부러진 게 아니라, 두 개가 된 거야


당신은 한 꼬마아이와 함께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함께 놀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아이가 힘을 너무 주었는지, 들고 있던 크레파스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자신의 물건이 부서졌다고 생각한 아이는 시무룩해져 버렸다. 그럴 때 당신은 아이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 같은가. 오늘은 "부정적인 상황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힘"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오늘 오전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 하나를 보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신의 손녀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영상이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들고 있던 크레파스가 둘로 쪼개졌고, 그걸 본 손녀는 "할머니가 크레파스를 부러뜨렸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크레파스가 두 개가 되었구나." 할머니 또한 자신이 부러뜨린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말을 손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손녀 또한 그들과 같이 크레파스가 '두 개가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크레파스가 부러진 것크레파스가 두 개가 된 것. 똑같은 사실임에도 우리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은 사뭇 달라진다. 자신의 크레파스를 누군가가 부러뜨렸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크레파스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는 것. 무엇이 자신에게 더 좋은 쪽으로 해석될지는 분명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현상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받아들이곤 했다. 여름엔 더우면 덥다고 불평을 하고, 겨울엔 춥다고 불평을 한다. 돈을 벌어도 자신이 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보너스를 받아도 '이것밖에 안 주냐"라고 입이 비쭉 튀어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거나, 이득을 보게 되었을 때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이는 반면, 또 다른 이는 그것에 매우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면 또다시 그 사람의 껍질은 한 꺼풀 벗겨진다. 처음 한 두 번은 고맙다고 말하지만, 몇 번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도 처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과 관련해서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나를 사랑하기에만 바쁘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때에 따라 끌어올리거나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나라도 나를 사랑해야지"라는 자기 최면만을 반복적으로 걸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불평불만인 사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 '나는 괜찮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지'라는 내로남불의 태도를 지닌 사람. 이들은 자신의 행동은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타인이 자신에게 하는 쓴소리에만 집중하며 귀를 닫고 '자신이 부조리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자존감이 높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 중 일상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실 좋지 않은 상황을 좋게 해석한다는 것에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벌어진 '사실'이니까 말이다.



사용하던 크레파스가 부러진 건 사실이다. 부러진 것을 부러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상황을 숨기거나 덮는 건,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좋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든 우리는 매일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크레파스가 부러졌다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인가? 몸살이 났다고 평생 쉴 순 없지 않은가. 결국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가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부정적인 상황들을 좀 더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부단히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욱 중요할 때도 있다. '사랑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시련과 고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그것이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누군가에게 힘든 일만 일어나진 않는다. 그것은 분명한 자신만의 착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매번 아름답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거지 같을 순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가. 매일 크레파스가 부러졌다고 투덜대고 있진 않았는가. 항상 나만 피해를 보고 있다, 내가 제일 불쌍하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라며 스스로를 자학하며 정작 본인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은 '응당 그래야 한다'며 별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가.



삶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도, 모든 걸 주지도 않는다. 떠올려보라. 당신의 매일 또한 항상 최악은 아니었다. 99% 최악인 날에도, 1% 정도는 차악인 경우들이 일어난다. 최악보다 차악에 집중하다 보면, 차악인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며, 그러다 보면 99%의 차악과 1%의 괜찮은 순간들이 나타난다. 매일이 행복하고 아무 탈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오히려 당신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그저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 모두 당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행복하지 않은 일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기분도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이 2가지를 꾸준히 하다 보면 당신도 언젠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크레파스가 2개가 됐잖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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