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이 '사랑'이였음을 깨닫다

by Quat


올해 어머니가 예순이 되셨다. 아버지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모여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돈과 관련된 문제라면 항상 언성부터 높이시던 아버지가, 이번 여행 경비 모두 자신이 내겠다고 하셨다. 의아했지만 그런가 보다고 넘어갔다. 비행기 티켓과 렌터카, 숙소까지 예약한 뒤 무사히 제주도로 출발했다. 다행히 여행을 하는 동안 날씨가 좋았다. 머문 숙소도 깔끔했고 음식들도 맛있었다. 제주도에서 머물렀던 2박 3일 내내 아버지가 돈과 관련해 무어라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박 3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어머니는 내게 창가 자리를 권하셨다. 바깥 구경도 하면서 사진도 찍으라는 말씀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승객들이 탑승하자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로 진입했다.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빠르게 달리던 비행기가 공중에 뜨는 게 느껴졌다.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콩알만 해진 건물들이 보였다. 출렁이는 바다엔 해 질 녘의 빛이 튕겨 온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 사진을 찍고 좌석에 기대자 여행 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들었다. 눈을 감은 뒤 도착하기 전까지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스마트폰을 들어 창 밖 풍경을 찍은 뒤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계셨다. 아버지도 가만히 어머니가 찍은 사진을 보곤 다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셨다. 두 분 다 말없이 창 밖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순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환갑을 맞은 어머니에게 나는, 여전히 자신보다 더 좋은 것을 보길 바라는 자식이었다. 사진을 찍은 뒤 그대로 눈을 감은 나와 달리, 창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남편을 위해 사진을 찍어 보여준 어머니. 철없는 행동을 한 것 같아 민망한 기분에 여행 동안 찍은 사진을 보는데, 문득 아버지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와이셔츠에 정장 차림. 구두까지 신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평생 고된 일을 하시다 보니 작업복으로 늘어진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으셨던 아버지였다.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하나가 보였다. 집 안에서 대부분 굳은 표정만 짓고 계셨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밝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상극'이라 할 정도로 성향이 반대다. 어떤 일에 대해서 아버지가 의견을 내면, 어머니는 대부분 반대 의견을 내곤 했다. 때로는 같은 의견을 말하면서도 다투기도 했다. 당차고 소신 있어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 기질을 가진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조용하고 내향적이며 마음 맞는 사람 몇몇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다. 그렇게 다른 기질을 가진 채 수십 년 동안 서로 부딪히며 살아온 걸 봐왔던 터라, 언젠가는 두 분이 이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함께 하며 자식인 나도 모르는 새, 두 분은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지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한다. 수십 년이란 시간은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기엔 충분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도 서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돈에 인색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이번 여행만큼은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위해 사진을 찍어 보여드린 것. 누군가는 이런 행동들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옆에서 두 분을 몇십 년 동안 봐온 내게 이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렇기에 두 분이 서로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게 내겐 놀라움이었다.




누구나 마음속 한편에 자신만의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이라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우리는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그 말, 그 행동, 그 손길이 '사랑'이었음을 말이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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