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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an 11. 2024

'약간의 이해와 배려'가,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문제가 터졌을 때 크게 2가지 유형으로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를 '부풀리는 사람'과, 문제를 '줄이려는' 사람으로. 상황에 따라 이러한 성향은 좋게 쓰이기도 하지만, 나쁘게 작용되기도 한다. 문제를 부풀리는 유형은 굳이 작은 문제를 부풀려 정말로 큰 문제가 돼버릴 때도 있지만, 그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도 한다. 반대로 문제를 줄이려는 유형은 자신이 가진 권한보다 조금 큰 문제들도 눈치껏 처리하곤 하지만, 그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땐 이미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문제를 부풀리는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평소 주변 사람들로부터 '예민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다. 문제는 줄이려는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무던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 두 유형이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하면,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부풀리는 유형이 문제를 줄이려는 유형에게 자신의 기준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무언가를 강력히 요구하거나 화를 내는 빈도 또한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잦은 편이었다.



나는 문제를 줄이려는 유형에 가까운 편이다. 나의 시선에서 문제를 부풀리는 유형의 사람들은 예민하고, 까칠하며, 별 것 아닌 일로도 화를 내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비치곤 했다. 그들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굳이 저렇게까지?'란 생각이 절로 떠오르는 동시에, '참 피곤하게 산다'며 때로는 측은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들 또한 그렇게까지 "스스로 예민해지고 싶지 않았음"을 말이다. 나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란 게 뻔히 보이기에, 성향과 더불어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걸. 어쩌면 그들 또한 자신의 짐을 덜어줄,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나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도 내겐 그들은 '화가 많은 사람'이자, '쓸데없는 기준들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어차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거, 그거 조금 이해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 아마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조금의 이해'가 얼마나 자신과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약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누군가와 관계 자체를 맺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는 급여에 미치지 못하면 아예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달라지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완벽하다'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부족하고, 실수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섰을 때 수많은 변화들이 생겨난다.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냈을 때, 우리는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 스스로도 잘한다고 여겼던 걸 해냈을 때보다 몇 배, 몇 십배의 감동과 희열과 행복에 취한다. 삶은 '완벽'과 '정확함'에 기인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별 것 아니라 여기는 수십, 수백의 '약간'과 '찰나'의 순간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당신이 아무리 착한 척을 해도, 약간의 손해를 입었을 때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적인 분노와 경멸의 눈빛은 감출 수 없다. 길을 걷다 툭 하고 어깨가 부딪혔을 때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욕설 한 마디가, 시간이 흘러 자신에게 어떻게 되돌아올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그 사람이 몇 달 후 당신의 직장 상사가 된다면, 당신이 결혼할 집안의 어른 중 한 분이라면 당신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자신이 막대한 손해를 입을 거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힘이 약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초라한 행색의 어르신에게, 고객센터 직원에게 불같이 화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의 입장을 약간이라도 이해하려 들기보다, 현재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너무 화나니까', '지금 내가 너무 이해가 안되니까' 이 말은 화를 내지 말라는 게 아니다. 정말로 성숙한 어른이라면 화가 나더라도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100%'가 아닌, 단지 몇 퍼센트라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내지르는 분노가 평생 당신을 지켜줄 거라 생각하지 말라.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강력한 이빨과 발톱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만약 그 분노가 예전보다 사그라든 후, 지금까지 당신과 척을 지던 사람들이 당신에게 달려든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보다 더한 분노가 당신을 덮친다면? 그것이 두려워 평생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바르르 치를 떠는 삶이 과연 당신이 바라는 삶의 형태인가.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건, 그전까지 당신이 타인에게 해왔던 '약간의 이해와 배려들'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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