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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May 10. 2022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공격적인가


 이 글의 제목은 최근 본 유튜브 영상에 나온 구절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 하나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다. 몸이 아닌, 마음이 말이다. 별 것 아닌 일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고 착각해, 흉기를 휘둘렀다는 뉴스를 보았다. 오늘 낮에 본 뉴스 기사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끔찍한 일을 겪은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기사를 접하며 가장 두려운 것은, 당장 내일이라도 우리가 이런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다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강력범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의 학대, 가난한 집안 환경, 친구들의 따돌림 등의 이유로 잘못된 가치관이 생기고, 이로 인해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른 사람도 사실 아주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매일 폭행을 당하고 밥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성격이 비뚤어진 이 사람에게 죄를 물어야 할까?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할 것이다. 왜 그럴까?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분명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처음 본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러도 되는 타당한 이유가 되진 않는다.  



또한 '힘들다'라는 건 주관적인 감정이다. 비싼 장난감을 부모님이 사주지 않을 때도, 그것을 갖고 싶은 아이는 슬프고 괴롭다고 느낀다. 다른 장난감은 많지만 유독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지 못한 아이와, '장난감'이라는 걸 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 두 아이 모두 장난감을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해 슬퍼하고 있다. 제삼자인 우리가 볼 땐, 전자에 비해 후자의 아이가 더욱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전자의 아이 또한 장난감을 갖지 못해 힘들고 괴로운 감정을 느낀다. 결국 우리의 시선에선 두 아이가 겪는 힘듦의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지만, 아이 스스로가 느끼는 '힘들다'는 감정은 두 아이 모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나는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조사해보니 이 범죄자가 후자의 아이가 아닌, 전자의 아이와 같은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이 밝혀졌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 사실을 알기 전보다 범죄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더욱 많아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과 더불어, 가중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커질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한 발짝 떨어져 어떤 상황을 지켜볼 때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당신이 '전자의 아이' 입장이라면, 좀 전처럼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아마 이에 대한 답변은 좀 더 세분화될 것이다.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모르겠다'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는 종종 친구들에게 연애와 관련된 얘기를 듣는다. 친한 정도나 상대방의 성향에 따라 사귀기 전 '썸의 단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귄 후에 얘기를 들을 수도 있다. 상대방의 얘기를 쭉 듣다 보면, 당신 나름대로 어느 정도 판단이 들 것이다. 좋은 만남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때로는 뜯어말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만약 당신이 아끼는 친구가 연애로 힘들어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답답함을 넘어 분노하기도 하고, 아무리 말려도 듣질 않는다면 '너 알아서 해라'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이번엔 당신이 연애를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자. 연인이 어떤 행동을 하던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가끔 당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만 상대를 좋아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아진다. 친구를 만나 얘기를 해도 헤어지라는 말만 한다. 당신을 생각해주는 친구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헤어지기엔 여전히 당신은 그 사람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렇게 몇 달을 속앓이 한 끝에, 당신은 결국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 이미 각오했음에도 당신은 헤어진 후 너무나 슬프고 괴롭다. 당분간 인생에 연애는 없다는 결심을 하곤, 당신은 서서히 감정을 정리한다.








아마 이런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친구의 연애에 대해 누구보다 객관적인 조언을 하던 사람이, 정작 스스로 연애를 할 땐 자신의 말처럼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것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처한 문제보다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다. 또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아파하며, 그것으로 인해 달라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사람 때문이야."라며,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할 때도 자신의 잘못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과 달라진 건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때문이며, 전처럼 상처받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나쁜 말들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탓에 비뚤어진 성격을 갖게 되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범죄자.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근거로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 물론 범죄의 흉악함은 다르며, 결코 범죄자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메커니즘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뉴스 속 범죄자들을 보며 욕하는 자신과, 주변 지인들과 가족에게 때로는 너무나 쉽게 모진 말을 내뱉는 자신이 가지는 모순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고 아파한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들 또한 자신이 피해자라고 한다.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 변한 이유에 대해 합리화하고, 타인에게 가시 돋친 말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변하기로 결심한 것은 '나의 의지'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을 지키는 것'과 '남을 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고, 어느 정도 미움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배배 꼬아 듣거나, 말한 의도를 본인 마음대로 해석해 혼자 상처받고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고쳐야 한다. 잊지 말자.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것처럼, 당신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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