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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May 14. 2022

'본질'에 충실한 관계가 '좋은' 관계다


'밸런스 게임'을 아는가? 거의 동등한 가치를 지닌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임이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자장면'과 '짬뽕', '우정'과 '사랑' 등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선택하기 전 고민해봤을 법한 2가지를 소신껏 고르는 것이다.



최근 SNS에서 흥미로운 밸런스 게임 주제를 본 적이 있다. 만약 당신이 성인이 된 후, 어렸을 적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나를 낳아준 부모'와 '나를 길러준 부모' 중 누구를 더 부모라고 생각할 것일지에 대한 주제였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나'를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해 준 사람들과,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나를 사랑으로 돌봐준 사람들. 당신이라면 둘 중 어떤 쪽을 부모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마다 선택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길러준 부모'를 선택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내 의지와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나를 선택하고 지금까지 보살펴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다해온 것이다. 심지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보살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대학생 때 조카를 1년 정도 돌보면서 육아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느껴봤었기 때문에, '길러준 부모'의 정성과 노력에 좀 더 마음이 기울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안정감과 애착을 느낀다. 오직 자신과 그 사람만이 겪은 특별한 추억들을 그려보기도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무작정 바다를 보러 갔던 날. 한밤중 차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했던 시간. 무더운 여름날 물놀이를 하고 저녁엔 고기를 구워 먹으며 웃었던 날. 그 해 내리는 첫눈을 보며 겨울이 왔음을 알게 된 날. 추억은 단지 좋았던 기억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슬프고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더해서 이 세상에서 나와 그 사람 단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누구와도 즐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사람이었기에'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이렇게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인 추억들은 상대방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끊어지려는 순간, 느닷없이 불쑥 떠오른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끈을 테이프로 칭칭 휘감아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와의 추억이 많을수록 쉽사리 그 관계를 놓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추억이 가진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버릴 때도 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쌓인 추억들이 많다는 이유로, 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사람을 단호하게 대하지 못한다. 이런 행동은 보이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나타나기도 한다. 밖에서 똑 부러지고 야무지게 행동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사람에겐 한없이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쌓인 추억 또한 많아지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추억은 좋은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들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그렇기에 쌓인 추억이 많다고 해서 단순히 좋다고 말하긴 힘들다. 글 맨 앞에서 언급했던 밸런스 게임에서, 나는 '낳아준 부모'보다 '길러준 부모'를 선택했다. 그런데 만약 나를 길러준 부모가 어렸을 적부터 나를 학대하고 못살게 굴었던 일들이 많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이 경우에도 나는 '길러준 부모'를 부모라고 생각할까? '낳아준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 또한 크겠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내게, 낳아준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쯤은 들지도 모르겠다.








나와 가까운 사이, 내가 아끼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들을 타인에 비해 관대하게 대한다. 그들이 내게 심한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됐고, 그만큼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을 거라고 넘겨버리곤 한다. 오히려 나를 위해 쓴소리를 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당신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매번 당신이 하는 행동에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당신에게 요구하며, 유독 당신에게만 칭찬에 인색하다고 느껴진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 또한 오랜 시간 함께한 학창 시절 친구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취미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향도 다른 부분들이 많았지만 함께 한 세월이 있었기에 그들을 친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내겐 즐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만날 때마다 마셔야 했다. 나를 제외하고 다들 술을 잘 마시다 보니, 그들에게 맞춰 마시다가 토하는 날도 있었다. 재밌지도 않은 얘기들을 들으며 억지로 웃어주는 날들 또한 많았다. 갑작스레 약속이 잡히는 걸 싫어하는 나와 달리, 그들 대부분은 즉흥적인 만남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에 친구라면 응당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학창 시절에 사귄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편하게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배려해주는 말과 행동들이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지도, 억지로 술을 권하지도 않았다. 어떤 분야에 대해 서로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의견을 존중했다. 7년이 넘게 만난 학창 시절 친구들보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대학교 때 사귄 친구들이 나라는 사람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비록 학창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친구들은 내 곁에 없지만, 20대부터 지금까지 기억하고픈 추억들을 훨씬 더 많이 쌓을 수 있었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가족이라 할 수 없고,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꼭 친구는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살펴봐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가 자식을 함부로 대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대드는 것이 일상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친구라는 명목 아래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려고만 하고, 치부를 들추는 것에 죄책 감 없이 행동한다면 그것을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관계는 결코 진정한 가족이나 친구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래도 친구니까'라는 말로 애써 관계 속 문제들을 외면하고 묻어둔 채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을만한 크기로 당신을 덮칠지도 모른다.




추억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은 늘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당시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시간들도 지나가면 추억이 된다. 당신의 추억 속 기억들을, 보다 아름답고 좋았던 기억들 위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을지 잘 선택해야 한다. 기억하라. 당신이 속한 어떤 관계가 무엇이든 절대 당연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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