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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l 14. 2024

행복하고 싶다면, 고통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참을 수 있는만큼 행복해진다는 것


당신은 행복과 고통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웬 헛소리냐'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 고통받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현재 많은 고통들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을 "행복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되도록 고통스러운 순간을 피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고 추구하려 든다.






나는 나중의 행복보단, 현재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도 시험공부를 할 때 집중이 잘 되지 않으면, 좋아하는 걸 하면서 기분전환을 한 후에 다시 공부를 했다.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가만히 앉아있는 게 훨씬 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은 꽤 효과적이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다시 자리에 앉으면 아까보다 집중력이 높아진 게 느껴졌다. 물론 이 방법이 매번 좋게만 작용한 건 아니었다. '1시간만 놀아야지'라고 다짐했지만 2,3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렇게 다시 앉아 공부를 하려 했지만, 결국 목표치를 채우지 못한 채 집으로 간 적도 많았다.


 

그 정도로 '지금 당장의 행복'이란, 내게 정말 중요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랬다. 그 당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하자"라는 말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은 다음에 만나도 여전히 시간이 부족했다. 그들은 항상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그들은 종종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바쁘게 살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져. 너도 열심히 좀 해봐." 궁금해진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과연 그때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커다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에 비해 더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나는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 자리에 앉아 있는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과연 이렇게 앉아있는다고 해서 1,20분 후에 집중력이 다시 생길까?' 공부뿐만 아니라 매사 모든 고통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했다. '이런다고 행복해질까?' 그러다보니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점점 작아졌으며,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시간 또한 짧아졌다.



고통을 느끼는 장소를 벗어나기만 해도 금방 행복해졌다. 그땐 그런 선택이 당연하고 옳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 점점 더 작은 고통에도 힘들어했고, 그 고통에서 달아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결국 나는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큼의 행복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나와 근처 카페에 가는 것, 퇴근 후 내 방에서 간식을 먹는 것. 주말에 근교로 드라이브를 떠나는 것. 그때 나는 스스로를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 여겼지만, 실은 '작은 행복밖에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 준비를 하면서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정말 많이 힘들었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하는데, 왜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거지?' 내 나름대로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고통을 견뎠지만 결과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만큼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또한 '나는 정도의 고통밖에 견딜 없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것도.



사실 지금도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고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지금 고통스러운 이 순간이 지나면, 분명 이 고통만큼의 행복이 찾아올 것이란 걸. 과거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수준과 양도 턱없이 적었다. 고통과 행복이란 별개의 개념이라고 여겼고,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해지기만을 바랬다. '소확행'이라는 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고, 하루가 즐겁지 않으면 삶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으냐고 여겼다. 분명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의 하루는 행복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그들의 고통은 행복으로 바뀌었고, 내가 누린 행복은 차곡차곡 누적된 고통으로 바뀌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행복해지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지금과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얼마나 행복해지고 싶어?"가 아니라, "얼마나 힘든 걸 견딜 수 있어?"라고.



사람을 만날 때도,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10가지 중 9가지가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그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들 중 대부분은 그 행복을 오래 누리지 못한다. 바로 나머지 1가지의 고통을 스스로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은 채 상대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왜 그건 못해?" 상대방도 본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더 큰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연애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라.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서로 맞춰가는데서 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이 겪는 고통 또한 어떤 식으로든 그만큼의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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