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두 시선 15화

[15화] 에필로그

by Quat

<몇 달 후>


알람소리와 함께 그녀는 눈을 뜬다.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팔을 휘저어 어림짐작으로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다. 밝기에 적응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에야 그녀의 남은 한쪽 눈도 번쩍 떠진다. 오 마이 갓.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과 함께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가는 날도, 바리스타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니지만 그녀가 일찍 일어난 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갈 곳이 있다.



그녀는 서둘러 씻고 옷을 입은 뒤 집을 나선다. 잠시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집 근처 편의점이다.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짧은 통화지만 그 사이에 그녀의 표정은 몇 번이나 바뀐다.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웃으며 전화를 끊는다. 무엇이든 그렇다. 어떻게 시작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결국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통화가 끝나고 몇 분이 지나서야 차 한 대가 도착한다. 이윽고 차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내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무어라 말한다. 자신은 제때 출발했는데 차가 막혔다나 뭐라나. 그녀 또한 그에게 무어라 말하면서 둘은 다시 차에 올라탄다. 그렇게 그들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매끈한 아스팔트 길과 승차감이 다소 별로인 비포장도로를 한참 지나서야 남자는 한적한 공터에 주차를 한다. 차에서 내린 그녀와 그의 손엔 비닐봉지가 하나씩 들려져 있고 남자는 다른 손에 막걸리 하나를 들고 있다. 이윽고 그들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여자가 앞장서고, 남자는 그 뒤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햇살이 내리쬐긴 하지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그늘이 충분히 그들을 가려주고 있다.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두 사람의 앞엔 비석과 함께 무덤이 하나 있다. 여자는 봉투에서 돗자리를 꺼내 펴고, 남자는 손에 들린 짐들을 그 위에 올려둔다. 잠시 후 남자는 무덤 주변에 자란 잡초들을 손으로 뽑아내고, 여자는 음식들을 준비한다. 얼추 마무리가 되자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여자는 절을 한다. 절을 하고 나서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몇 분 동안 혼잣말을 이어나간다. 마지막으로 여자는 무덤 앞에 무언가를 올려 둔 뒤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한 뒤, 일어나 남자 쪽으로 걸어간다. 무덤 앞엔 놓인 건 그녀가 직접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이다.






편의점 점주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녀에게 묻는다. “할머니랑 인사는 잘했고?” 그녀는 미소 짓는다. “네. 덕분에 잘했어요. 할머니도 고맙다고 전해달랬어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그녀와 산을 내려간다. 차에 올라탄 뒤 출발하기 전, 남자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그녀를 쳐다본다. “그런데 할머니가 커피를 드셔본 적은 있나?” 그러자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답한다. “아마... 믹스커피는 드셔보셨을걸요?” “그럼 저런 커피는 처음 드시는 거겠네.” “그렇죠. 제가 만든 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물론 이런 걸 왜 마시냐고 한 소리는 하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커다랗게 웃는다. 그 또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은 뒤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그녀는 창문을 내린 뒤 할머니의 산소가 있던 곳을 바라본다. 분명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이런 걸 왜 마시냐고 자신에게 한 소리 할 게 뻔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 다급하게 ‘그래도 먹다 보니 괜찮네’라고 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동안 그녀의 손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며 꽤나 속이 상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할머니도 꼭 옳은 선택만 하며 산 건 아니지 않은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았다. 그거면 된 것이다.



그녀는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밖을 바라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싱그러운 초록빛이 온 사방에 가득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의 진동이 바퀴부터 시작해 창문을 거쳐 그녀의 몸에도 전달된다. 속이 약간 메슥거리긴 해도 그런 떨림이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소름 끼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보다, 몸은 힘들지라도 변화가 느껴지는 지금이 행복하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떼고 창문을 내린다. 시원한 바람이 불며 그녀의 뺨을 슬며시 어루만진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볼을 토닥거리던 그 손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 위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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