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uat May 28. 2022

대화를 '나눈다'는 것


나는 토요일에도 격주로 출근을 한다. 주말 출근이라는 말에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썩 나쁘진 않다. 일단 살고 있는 곳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아주 가깝고(걸어서 5분), 12시까지만 일을 하면 된다. 가장 좋은 건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이다. 평일에 비해 출근하는 사람들도 적고 12시 퇴근이라 그다지 할 일이 많지도 않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면 함께 출근하는 직장 동료분과 퇴근까지 대화를 나누곤 한다. 누군가와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대화 스타일과 상대방의 대화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내향적인 내 성격상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바로 텐션을 높여 대화를 하기보단,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텐션을 높이는 스타일이다. 어느 정도의 예열 시간이 있어야 말수가 점점 많아지는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 얘기할수록, 오히려 말이 많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아진다. 대화를 할 때도 만나는 시간 동안 빈틈없이 얘기로 꽉 채운다기보단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똑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더라도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 즐거움 또한 달라진다. 나보다 대화의 예열 시간이 빠른 사람일 경우엔, 적극적으로 말을 건 상대방이 나의 대답과 행동을 보고 흥이 식어버릴 확률이 높다. 쉴 새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하는 사람일 경우엔 내가 먼저 지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자극적인 주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애기들로 시작한 뒤 조금씩 속에 있는 얘기를 솔직하게 꺼낼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가장 즐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요일의 대화는 내게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평일과는 다른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 비슷한 관심사와 대화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말하며 즐겁게 대화를 했다. '혼자 살아보는 시간의 필요성'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행동', '결혼 후 경제권', 'MBTI 중 I와 E의 차이' 등 살면서 친구나 지인들을 통해 들어봤거나, 한 번쯤 혼자 생각해봤던 주제들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니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이런 얘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마치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처럼 수다를 떤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편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지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대화를 하는 내내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은 적이 없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야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또한 상대와 자신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조금 다를지라도 그 '다름'에 집중하지 않고 넘어갔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게 행동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을 더 많이 했다.



결국 긴 시간 동안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건, 무엇을 더 잘했다라기보단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자신의 말을 하느라 상대방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상대가 말하는 도중 툭 자르고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피드백을 준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자신과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한국어로는 '대화를 나눈다'라고 표현한다. '나눈다'는 건 무언가를 균등하게 분할한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말에도 '나눈다'라는 표현을 왜 붙였을까. 만약 대화를 100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상대방과 나누었을 때 똑같이 50씩 가지게 될 것이다. 자신이 더 많이 가지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가진 대화의 몫을 내가 더 많이 차지할수록 이것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게 된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쑥 말을 꺼낸다면, 이것은 상대의 대화를 가로채는 행위다.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몫이 많아질수록,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오히려 줄어들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이런 불평등한 대화를 유지하고 싶어 하겠는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누구를 사랑하든 최소한의 자기 몫은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받아야 일하지', '적어도 상대가 이 정도는 돼야 연애하지'와 같은 마음가짐 말이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상대와 내가 말하는 시간을 정확하게 나눌 순 없지만, 적어도 '대화를 나눈다'라고 한다면 상대방이 가져야 할 몫은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대화를 잘하는 사람인 동시에,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말을 잘하더라도 대화를 못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결국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이 말을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자신의 몫을 상대에게 자꾸 양보해선 안 된다. 대화에 참여했다면 최소한 자기가 가져야 할 몫은 스스로 챙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대화를 잘하긴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반대로 누군가 당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대화의 몫까지 자꾸 가져가려 한다면, 그것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결국 대화라는 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닌, 서로 함께 의견을 나누는 행위니까. 우리 모두 대화에서 자신의 몫을 지킬 줄 알고, 상대의 몫도 챙겨주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기력할 땐 초콜릿이 최고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