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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01. 2022

'의미 없는 다정함'은 정말 범죄일까?


사람은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말을 잘하는 사람, 배려심이 많은 사람, 뛰어난 센스를 가진 사람,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 등등 누구나 타인에 비해 잘하는 게 하나 이상 몸에 배어 있다. 다른 환경에서 만난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한다면, 그것이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나는 20대 때부터 '다정하다', '배려심이 많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상대방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낮은 목소리 톤과 어투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지방에서 태어나고 오랫동안 생활했음에도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편이라 "고향이 어디냐" 또는 "서울에서 태어났냐"는 말도 꽤 들었다. 이런 특징들 덕분에 다른 사람과 언쟁을 벌이거나 다퉜던 적도 별로 없었다.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칭찬인 건 맞다. 하지만 이런 특성이 항상 좋게만 작용하진 않는다.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게 도대체 뭐가 나쁜데?"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뜻 들으면 분명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평소 다정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모임 활동을 할 때였다. 한 번은 모임에서 알게 된 동생과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농담도 하고 재미있게 놀던 중, 동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는 원래 모든 사람한테 그렇게 잘해줘?" 갑작스러운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 잘해주진 않아. 그냥... 맞춰줄 수 있다면 맞춰주는 거지." 내 말을 들은 동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맞춰줄 수 있어?" 그때 내 대답이 뭐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좋아하지 않는 것'과 '싫어한다'는 건 분명 다르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배려하지 않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대충 그런 의미가 담긴 뉘앙스로 대답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다시 동생과 만나 술을 마셨던 날이었다. 벤치에 앉아 술도 깰 겸 대화를 하다가 동생이 내게 말했다. "처음엔 오빠가 모든 사람한테 다 잘해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오빠가 마냥 친절한 건 아니더라고. 그중에서도 더 잘해주는 사람, 덜 잘해주는 사람이 보이더라." "정확하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 상대방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 또한 그 사람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대신 좀 더 대화가 잘 통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들을 좀 더 챙겨줄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생각도 들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타인을 대했던 행동들이, 누군가의 시선에선 '좋아한다'라고 느낄 만큼의 수준이었나. 만약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로 인해 상대방이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면 거기에 내 책임은 없는 걸까. 도대체 어디까지 표현하고, 어디에서 멈추는 게 적당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든 이후로 타인을 향한 다정함에 브레이크를 밟는 연습을 시작했다. 조금 더 잘해줄 수 있더라도, 타인이 봤을 때 행동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면 조심하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함이지만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의미 없는 다정함은 범죄'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진 알지만, 한편으론 이 말이 가지는 오류 또한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다정하다'는 건 말 그대로 정이 많다는 것이다. 정이 많은 사람들은 타고난 배려심 또한 많다. 배려심이 많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려심이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섬세하게' 살핀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이 밥을 먹을 때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에게 휴지를 건네준다. 약을 먹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는 사람에겐 미리 물을 떠준다. 오늘따라 표정이 좋지 않다면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묻는다. 주변 사람들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배려심 많고 정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빠르게 캐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관찰력이 좋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이유만으로 '플러팅'이나 '끼 부린다'라는 오해를 받기엔 억울한 감이 있다.



개인적으로 '배려심이 많은 것'과 '끼를 부린다'라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성 간의 지나친 배려'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휴지를 건네주거나 다 마신 물컵을 채워주는 건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해도 상관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흘러내린 옷을 올려주거나, 사귀지도 않는데 지나친 스킨십을 하려 드는 건 배려라고 볼 수 없다. 결국 이성에게 끼를 부리는 사람들이 '내가 한 건 배려였다'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태도로 인해, 단지 배려심 있는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욕을 먹는 것이다.






배려심이 있는 사람과 끼 부리는 사람. 어찌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누가,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의미 없는 다정함을 겪어본 사람이 이 글을 보면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분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몇 끼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몸을 사리는 개념 있는 정 많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더 잘해줄 수 있는데도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자신의 배려를 아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단 것을 말이다.



가능하다면 '의미 없는 다정함은 범죄'라는 말을, '의미 없는 끼부림은 범죄'로 수정해서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다정함과 끼를 부리는 것은 분명 다르다. 다정함 안에 끼부림이 포함되는 것이지, 끼부림 안에 다정함이 포함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후자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부모님에게 "플러팅 좀 그만하세요!"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에서 덤으로 반찬을 더 주시는 어르신에게 "지금 저한테 끼 부리시는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분명 둘을 구분한다는 게 힘들다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다정한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왜곡해서 보지 않았으면 한다. 가끔 나와 비슷한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다정한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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