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2> : 갈라지다

by Quat


집을 빠져나와 그들은 다시 숲길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 뉘엿뉘엿 지던 해는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였고, 어둠은 그들을 덮치려던 죽음보다 더 빠르게 온세상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다행히 처음 서바이벌을 시작할 때 각자 손전등이 하나씩 주어졌기에, 길을 걷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피로와 배고픔이었다.


상혁은 선두에서 계속해서 걷던 태하를 가까스로 따라가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하다 말했다. 잠깐의 언쟁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태하가 자신의 고집을 꺾은 가장 큰 이유는 상혁이 주영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결정에 불만인 듯 준혁은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이내 태하가 쉴 곳을 찾아보자는 말에 헐레벌떡 그를 따라갔다. 30분 정도 쉴 곳을 찾던 중 양하가 괜찮은 곳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1시간 남짓 달콤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잠깐의 휴식 후 또다시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걷던 중, 상혁은 하마터면 앞에서 걷던 준혁과 부딪힐 뻔했다.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준혁도 마찬가지였다. 궁시렁거리는 준혁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상혁은 선두에서 멈춰 선 태하의 등을 지나쳐 태하가 비추고 있는 손전등의 불빛이 머무는 곳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왜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는지 바로 이해했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에서 약 3m 정도 떨어진 곳. 그곳엔 갈림길이 있었다.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갈림길 앞으로 걸어갔다. 왼쪽 길은 흙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발자국이 여럿 찍혀 있었다.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 오른쪽 길은 풀과 나무가 무성해 길인지조차 애매했다. 가지가 얼굴을 때렸고, 땅엔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상혁은 양쪽 길이 눈에 띄게 다르다는 걸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분명 그들을 시험하는 얄팍한 수에 분명했다. 그때 준혁이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사람 지나간 길이잖아요. 그쪽이 안전한 거 아닐까요?”

준혁의 말에 주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이 있다는 건, 적어도 누가 살아서 지나갔다는 뜻이니까.”

태하는 잠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혁은 그를 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았지만 나머지 3명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태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왼쪽으로 갑니다.”


상혁은 반사적으로 오른쪽을 봤다. ‘안전해 보이는 길’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마치 유도처럼.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양호가 먼저 말했다.

“왼쪽이 안전하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준혁이 짜증 섞인 웃음을 냈다.

“아, 또 시작이네.”

양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사람 흔적이 있다고 안전하다는 건, 우리가 평소에 길을 선택하는 방식이죠. 근데 지금은 누가 설계한 게임이에요.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을 이용할 가능성이 커요.”

태하가 팔짱을 꼈다. 키 차이 때문에 양호가 더 작아 보였다. 목소리도 태하에 비해 얇았다. 그런데 양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른쪽은 길이 아니라서 위험해 보이지만... 오히려 덫이 설치되기 어려워요. 설치하려면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때 태하가 양호의 말을 잘랐다.

“시간이 없으니 그만하죠.”


태하의 낮지만 단호한 한 마디에 양호의 입술이 굳었다. 상혁은 그 표정을 잘 알았다. 회사에서 늘 보던 표정이었다. 말이 논리적으로 맞아도 ‘말하는 사람이’ 약해 보이면 묵살되는 순간의 표정.

준혁이 한술 더 떴다.

“양호 씨, 솔직히 말해서요. 지금 당신 체력으로 오른쪽 가면 우리도 같이 죽어요. 알죠? 같이 죽는 거.”

분위기가 점점 날카로워지자 주영이 애매하게 웃으며 양호를 달랬다.

“양호 씨 말도 일리는 있는데... 지금은 다 같이 가야 하니까. 다수결로.”

양호가 조용히 말했다. “다수결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아요.”

태하가 낮게 웃었다.

“그렇지만 양호씨도 그 '다수결'에 따랐기에 이 자리에 있을텐데?”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던 상혁이 입을 열었다.

“태하 씨. 양호 씨 말 들어보는 게.”

준혁이 상혁을 흘겨봤다.

“상혁 씨, 지금도 양호 씨 편 드세요? 아니... 뭐, 성격이 좋으신 건 알겠는데요. 지금은.”

그때 태하가 몸을 돌려 상혁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고, 그걸 본 준혁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상혁은 자신을 응시하는 태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혁 씨. 시간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어둠 속에서도 그가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자 묘한 압박이 생겼다. 너까지 흔들리면 이 팀은 무너진다. 그런 말 없는 강요가 느껴졌다. 상혁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느꼈다. 그리고 그게 더 싫었다. 그때 옆에서 양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시각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말을 할까, 말까. 지금까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분명 태하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확한 판단들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그가 혼자서 내린 결정이 언제까지 옳은 방향을 가리킬까. 말이 좋아 다수결이었지, 사실 태하가 내린 결정에 모두가 동의한 것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내고, 그 중 다수가 동의한 안건에 최종적으로 모두가 따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다수결이다. 마침내 결심한 상혁은 다시 눈을 뜬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오른쪽.”


“상혁씨 방금 뭐라고?”

“오른쪽으로 갑니다. 양호 씨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흔적은 유도일 수도 있고.”

주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혁 씨, 지금 팀을...”

“팀? 이게 팀이에요? 누가 말하면 무조건 따르는 게?”

순간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상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여전히 상혁 앞에 서 있던 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네요.”

그 말을 끝으로 태하는 몸을 돌려 왼쪽 갈림길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걸어갔다. 준혁은 혀를 차며 작게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말하더니, 혹여 태하를 놓칠까봐 다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태하와 준혁, 상혁과 양호 사이에 서 있던 주영은 멀어지는 태하와 준혁과 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상혁과 양호를 두 어 번 번갈아쳐다보았다. 결국 그녀도 몸을 돌려 왼쪽 갈림길로 걸어갔다. 그렇게 그들은 갈라졌다. 다섯 명의 생존자 중, 셋은 왼쪽으로. 둘은 오른쪽으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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