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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18. 2022

쉬어야 해요. 그래야 더 '잘' 듣거든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사람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대화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그렇지 않은 사람. 당신은 둘 중 어디에 속하는 편인가?






나는 둘 중 후자, 즉 대화의 공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편이다. 오히려 공백 없이 대화를 하면 어느 순간부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 채 상대방의 얘기를 들으며 기계적인 리액션이 자동적으로 나온다. 친함의 정도에 따라 말이 멈추는 시간은 달라도, 누구를 만나든 입을 다무는 순간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대화가 끊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들이 아마 낯설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의문이 들기 마련이니까. 더 나아가 '저 사람은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건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적지근한 태도였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분명 재미있게 대화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입을 다물고 한숨을 쉬며 멍하니 한 곳에 시선을 멈추고 있다면 어떨까? 아마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다음 대화를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나 또한 편한 사람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걸 매우 즐기는 편이다. 대인관계, 연애, 결혼, 재테크, MBTI, 가치관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주제들로 밤새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대화 중간에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이런 주제들로 대화를 나누면, 처음 듣는 새로운 정보들로 머릿속이 꽉 차곤 한다. 아무런 가구도 없는 빈 집에 새로 산 가구들을 마구잡이로 들여놓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다 보면 이 정보들을 정리할 시간들이 필요해진다. 상대방이 과거 어떤 연애를 해왔는지, 현재 어떤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등 다양한 정보들을 내 나름대로 차곡차곡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꼭 기억해야 할 정보들은 다시 되새겨보고,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정보들은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몇 분 간 멍하니 앉아, 지금껏 들은 상대방에 대한 얘기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이다.






쉬어가는 시간은 정보 정리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있다. 다시 경청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당신은 정말 집중해서 상대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오늘 상대가 겪었던 일을 듣는 동시에 내 머릿속에선 여러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처리된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방의 평소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그 일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만약 내가 상대였다면, 그 일을 겪였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지금 상대에겐 조언과 공감 중 어떤 것이 더 필요한 상태인 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할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할까?' '만약 조언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효과적이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이런 생각들을 전부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상대에게 가지는 호감이 클수록,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호감이 큰 사람과 대화를 할 때일수록, 쉬어가는 시간이 더 자주 필요해질 때도 있다. 상대가 평소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성향이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이럴 땐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힘들었던 상황에 대해 공감을 먼저 해주는 편이지만, 만약 상대가 같은 상황에 대한 고민을 반복해서 말하는 경우라면 현실적인 조언을 전달할 때도 있다.


 




내게 대화에 공백이 필요한 건 대화가 싫어서가 아닌, 보다 더 양질의 대화를 나누기 위한 수단이다. 5분의 침묵만 보장된다면, 충전 후 전처럼 경청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대화의 공백이 필요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함을 느낀다. 휴식을 통해 들었던 상대방의 정보를 정리하고, 경청하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인 뇌를 쉬도록 내버려 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내뱉으며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면, 다시 쌩쌩하게 대화를 할 준비가 완료된다.



당신도 친한 친구 또는 연인과 재미있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상대가 입을 닫고 먼 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전날 늦게 잔 탓에 피곤할 수도 있고, 현재 대화 주제가 재미없다고 느껴서일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상대와 친하다는 전제 하에 피곤하냐, 재미가 없냐라고 물었을 때 상대가 둘 다 아니라고 한다면, 나처럼 대화의 공백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을지 모른다. 그럴 땐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거는 것보다, 잠깐 내버려 두는 걸 추천한다. 상대와의 대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더 재미있게 대화를 하기 위해 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을 응원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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