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간의 유대가 점점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던 요즘이었다. 입대 전만 해도 그렇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경쟁의 사회에서 우리는 유대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쓰기 바쁘다. 어쩔 수 없다. 나 스스로를 챙기기도 바쁜데 누가 다른 사람을 챙기려고 할까. 그만큼 서로에 대한 배려도 공감도 존중도 점점 사라지고 삭막해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사회 모습이다.
물론 군부대에서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 내가 하려는 얘기가 모든 부대에 통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장 여단 쪽만 해도 들리는 얘기가 중대별로 거의 담쌓고 훈련할 때나 같이 행동한다는 말도 들릴 정도인데, 어느 부대에서는 중대들이 다 두루두루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곳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미화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는 느낌의 이야기인 것이다.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복무를 하는 군대라고 해도 사실 개개인에게 부여된 임무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남남이 되기 일쑤다. 정확히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다. 두 가지 일화를 비교해 보자.
내 친구 중에는 공익이나 면제의 비율이 좀 높은 편이다. 현역 복무를 하는 친구들이 더 적은 모임도 있다. 그렇다고 인원수가 적지도 않다. 13명이 모이면 현역이 절반 이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인지 나조차도 의문이 들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 친구들 간에 가끔 언성이 높아지면 나오는 이야기. 공익(사회복무요원)은 대부분 힘든 일은 하지 않고 안에서 일하니 날로 먹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현역 친구 중에서 조금 말이 센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잊을 법하면 늘 이런 말을 해서 분위기가 싸해지게 한다.
저 친구에 대한 판단은 잠시 접어두고 다른 예시를 들어보려 한다.
대대에서 전투중대(소총수/박격포병 등)와 본부중대(통신/군수/정작병 등)가 구분되면 늘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주로 전투중대의 한탄인데, 본부중대는 아무래도 특기를 배정받아 일하는 특수보직의 병사들을 모아놓은 중대인 경우가 많다 보니 더 이런 이야기를 듣기가 쉽다.
본부중대는 각자의 일 하는 것들도 많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과에서 처부 업무로 열외 되니까 처부 업무가 힘들지 않으면 사실상 소위 '꿀 빠는', 그니까 쉽게 말해 우리보다 너네가 덜 고생하고 쉬운 일만 한다는 얘기다. 예초 작업이나 중대 단위로 물자를 옮기거나 할 때도 가용병력이 모아지지 않는 이상 본부중대원들은 각자의 처부 업무가 바쁜 경우가 많으니 밖에서 고생할 일도 적다는 것.
결국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내 친구도 그렇고 전투중대도 그렇고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하는 거 너네는 안 하잖아'인 것이다. 같은 성인 남성으로서 군대를 가야 하는데 너네는 안 갔잖아. 같은 군인으로서 일하는데 너네는 우리랑 같이 일 안 했잖아.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서로가 또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간 친구들이나 면제 친구들이 자기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고, (물론 그걸 악용하는 사람도 있어서 문제지만) 대부분은 선천적 지병이나 사고 등의 이유로 적합한 이유가 있어서 현역 복무가 어려운 경우다. 그리고 그들도 나름의 고충이 분명 존재한다. 내 친구 몇몇만 해도 현역들은 잘 모를 수 있는 고충이 있다고 한다. 복무하는 위치도 다 다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차이는 더 크다.
나도 본부중대 인원으로서 할 말을 하자면, 우리도 또 억울한 부분이다. 처부 업무가 있고 싶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특기로 배정받아서 배워서 하는 것들을 전투중대 인원들이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두고 늘 가용인원이 생길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부대 상의 이유로 통신병들은 다른 인원들이 취침소등에 들어갈 시간까지도 추가 업무를 하기도 했다. 주말에도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서로가 너무 힘드니까, 군 복무는 길고 답답하니까 일단 자기 자신부터 신경 쓰기 벅차니까,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나보다 힘든 것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더 힘든 면을 바라보려 한다. 그게 사람들의 공통적인 면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가치 판단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좋은 말이다. 우리 사회가 동시에 가장 못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내가 저랬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내가 조금 여유로울 때 다른 사람을 보고서 '아,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내가 바쁘고 정신없을 때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까? '저 사람도 나만큼 바쁘구나' 정도만 생각해도 다행인 수준이다. '내 일은 왜 이렇게 안 끝나는 거야?', '저 사람은 내가 이렇게 바쁜데 왜 저렇게 놀고 있을 수 있는 거지?', '할 일이 없나?'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더 먼저 떠오르지는 않는가?
당장 최근에 나도 이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분명 같은 통신병이고 동기임에도, 나는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한 역량이 있다고 일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동기는 옆에서 할 게 없다며 쉬다가 PX를 가는 모습이 최근 자주 보였다. 그러다 보니 한순간에 욱해진 감정에 언성이 높아져서 말하기도 했다.
솔직히 억울했다. 선임도 아니고 동기가 그러니까. 도와줄 게 있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부분에서 그런 말 한마디 없이 돌아오는 말은 '네가 그걸 하고 있었고 그 일에 두 명이나 붙어서 할 필요는 없잖아' 같은 어찌 보면 맞지만 서운한 말 한마디였다.
조금만 더 서로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동기는 자신이 도와줄 면이 그래도 있진 않은지 확인해 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니야, 쉬어도 돼'라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동기가 쉬는 것과는 천지차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도 잘한 건 아니다. 내가 제한되는 부분은 그 친구가 가서 하고 온 것도 있는데 당장 더 하고 있다고 내가 동기에게 언성을 높였으니 동기도 분명 억울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개인이 마음의 여유를 찾아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나야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조금 진정하고, 자신의 격해진 감정이나 현재의 불안감이나 압박은 잠시 내려놓고 심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상황을 조금 더 포괄적으로 바라보자. 내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공감과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힘든 점을 듣고 말하며 공유한다. 서로에게서 그 부분을 공감한다. 그리고 도울 수 있다면 배려하고, 입장을 존중해 주려 노력한다.
굳게 닫힌 문은 열지 않아서 닫혀 있을 뿐이다. 주변의 환경 때문이라고 닫힌 문을 탓하지 말자. 오늘의 나에게, 내일의 나에게, 앞으로의 우리에게 이 말을 건네보자. '마음의 여유를 잠시라도 가져보며 문을 열어보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