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양주

나의 살던 경기도

반짝이던 마을, 일곱 살의 샘내


1981년.

서울에서 살던 우리는 가산을 홀랑 말아먹고 트럭 한 대에 남은 세간을 싣고 북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군복무를 했던 곳 근처에 살만한 곳이 있을 거라 했다. 그 마을의 입구에는 마치 표지판처럼 나란히 두 개의 가게가 서 있었다. 엄마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마을의 이름은 샘내였다. 맑은 샘에서 물이 솟아 마을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샘내라 불렀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그 시절에 엄마에게 낭만은 남아있던 모양이다. 1) 샘내상회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시며 엄마는 살 집을 구한다고 말했다. 가게주인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마을 한복판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되었다. 그 집의 뒤채에 한 칸짜리 셋방이 있었다.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마당은 넓었다. 집 밖에도 마을광장처럼 펼쳐진 공터가 있었다. 집은 샘내의 개천에 딱 붙어 있었는데 개천과 집 사이에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개천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 집은 서울에서 액자공장과 가게를 했다. 빈손이 되어 샘내로 갔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엄마 아빠는 그 일을 계속했다. 샘내상회 바로 뒤에 작은 작업장을 얻었다. 작업장은 아빠에게 너무 좁았다. 몸 한 번 돌리기도 쉽지 않은 곳에 작업대를 놓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만든 액자를 머리에 이고 39번 영종여객 버스를 타고 의정부에 갔다. 성화를 파는 서점에 한 두 개씩 액자를 납품해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때 나는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었다. 내가 집 앞마당에 나와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면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구경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구경거리로 지냈을 뿐, 나는 동네 아이들과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기 시작했다. 봄이면 아이들과 같이 논바닥에 들어가 올챙이를 잡았다. 뒷다리가 나온 개구리를 보고 어쩐지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사이다병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은 엄마와 산보를 하다가 할미꽃을 꺾어와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할미꽃 함부로 꺾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면서도 몇 번이고 꽃을 꺾어왔다. 마을에는 반딧불이도 많아서 몇 마리 잡아 유리병에 담아 온 적도 있다. 할미꽃 옆에서 반딧불이가 밝은 빛을 냈다. 그날 밤은 반짝이는 반딧불이 때문에 할미꽃이랑 자꾸 눈이 마주쳤다. 할미꽃은 영혼이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울에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천이 꽝꽝 얼어붙어 아이들이 썰매를 탔다. 다들 집에서 누군가 만들어 준 나무썰매를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썰매 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빨간 피겨스케이트를 사 왔다. 마을에서 나만 가진 스케이트였지만, 아이들이 딱히 부러워하지 않았다. 뽐내려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소나무가 있던 집에서 월세를 밀린 모양이다. 우리는 큰길 건너로 이사를 했다. 샘내상회 앞에는 영종여객 39번 버스가 다니는 2) 큰길이 있고 그 길이 남으로는 의정부, 북으로는 동두천으로 이어졌다. 이 길을 건너면 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큰길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의 느낌은 달랐다. 3) 새로 이사한 길 건너 동네에는 커다란 소가죽 공장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소가죽의 시큼한 냄새가 밀려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가면 색이 다 빠진 소가죽이 기저귀 빨래처럼 넓은 벌판에 널려 있었다. 소가죽은 무거워도 가끔 흔들렸다. 우리는 소가죽을 널어놓은 곳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집엔 내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집주인아줌마는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파란색 장화를 신고 일을 다녔다. 하루는 내가 주인집에 들어가 그 집 아이들과 넋 놓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퇴근하던 주인아줌마가 “너는 맨날 여기 와서 티비 보냐?”라고 꾸지람을 했다.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주인집에 놀러 가지 말라고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월세를 밀렸던가, 우리는 다시 길을 건너 처음 살던 집보다 더 깊은 곳으로 이사했다. 처음 살던 마당이 넓은 집은 마을의 갈래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집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넓은 파밭이 있고 산 아랫길을 따라 집이 몇 채 있었다. 우리의 새 집은 마을의 제일 끝에 있었다. 집주인의 딸 이름은 신애, 나와 동갑이었다.

신애하고는 싸우기도 했고 잘 놀기도 했다. 주인집 딸이라고 유세를 좀 부렸고, 나는 신애가 못하는 것을 뽐내면서 기싸움을 했다.

신애네 집 뒤쪽에는 젖소 우리가 있었다. 네댓 마리의 젖소가 느리게 돌아다니며 꼴을 먹었다. 아침마다 덕계리에 있는 서울우유 공장에서 우유를 받으러 왔다. 나와 신애는 가끔 신애 아빠가 소의 젖을 짜는 걸 구경했다. 신애 아빠는 소젖을 생으로 먹으면 크게 배탈이 나니 입에 대지 말라고 일렀다.

우리가 세를 든 곳은 신애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돼지막사에 붙어 있는 가건물이었다. 우리 가족이 쓸 수 있는 화장실은 한참 밖에 있어 밤이 되면 휴지를 들고 뛰어갔다 와야 했다. 마루에는 가끔 쥐도 들락거렸다. 외국에서 돌아온 큰 아빠는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을 사다 줬다. 어느 하루 깜빡하고 마루에 인형을 두고 잔 날, 인형의 볼이 뜯겨있었다.

돼지막사에서는 돼지를 꽤 많이 키웠는데 ‘꽤 많이’라고 해봤자 100여두 정도였을 것이다. 가끔 신애가 꼬마돼지들을 이끌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신애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돼지들을 몰고 다녔다.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신애는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커다란 어미돼지들은 가끔 파란 트럭에 실려가기도 했다. 돼지 궁둥이에는 초록색 도장이 찍혔다. 돼지들이 차에 오를 때마다 꽥꽥 대며 울었고 엉덩이에 붙은 더러운 똥과 진흙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끔은 소도 용달트럭을 타고 사라졌다. 소들이 차에 오르면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들은 소리 내어 울며 마을을 떠났다.

집 바로 뒤에는 신애 아빠가 관리하던 양봉장이 있었다. 발달이 좀 늦었던 동생은 양봉통 앞에 멍하니 서서 수십 방을 쏘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신애네는 젖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벌도 치고 농사도 짓느라 늘 바빴다. 신애의 엄마 아빠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했다.

신애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있던 집은 대문 바깥 마당에 당근을 가득 심었다. 그 집 아줌마는 우리를 보고 아무 때나 당근을 뽑아다 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자주 당근을 뽑아다 간식으로 먹었다.

한 번은 집 뒤에 언덕과 무덤가에서 불이 났다. 아빠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불을 껐다. 아빠는 밤새 끙끙대고 앓았다.


신애네 집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4) 옆 마을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이 더 빠른 것 같진 않지만 큰 차도로 다니면 위험하다고 엄마는 숲 속 오솔길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기도 했고 뱀이 스르륵 지나갔다. 뱀딸기와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우리는 그 산길을 넘어 어떤 아이의 집에 다녔는데 엄마가 거길 왜 가끔 갔는지는 모른다. 나와 동갑내기인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 엄마가 그 집 엄마한테 돈을 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가 잠깐 키우던 강아지 메리가 큰 개가 되었을 때, 그 집에 주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 마을 입구에 있는 5) 샘물교회에서 선교원을 열었다. 나도 선교원에 몇 달 다녔다. 선교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엄마가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나에게 내일부터 선교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고 했다. 신애는 노란 모자를 쓰고 선교원에 갔지만,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선교원에서 졸업식에는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열리는 선교원 졸업식에 갔다. 학사모 비슷한 걸 쓰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서울 살 때는 사진이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파는 물건은 피아노나 카메라니까. 샘내에 살던 시절엔 카메라가 없었다.


이듬해 신애와 나는 덕계리에 있는 덕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까지 어린아이 혼자 걸어가기엔 멀었고 길도 위험했다. 샘내 뿐 아니라 주변이 온통 군부대 천지라, 장갑차와 탱크가 수시로 다녔다. 서울우유 냉장차에 커다란 트럭들은 큰길을 쌩쌩 달렸다. 버스를 타는 것이 좋은데, 샘내에는 특별한 관습이 있었다.

매일 아침 8시에 샘물상회 앞에서 샘내에 사는 모든 덕산국민학교 아이들이 모인다. 이 시간에 늦으면 혼자 학교를 가야 한다. 6학년 1반 오빠가 맨 앞에 서고 학년별로 둘씩 짝지어 줄을 섰다. 6학년들과 5학년들이 앞뒤로 나누어 동생들은 그 사이에 섰다. 모두 모인 것이 확인되면 6학년 1반 반장 오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왼편에 산을 두고 큰 도로를 따라 학교로 걸어갔다. 진달개꽃을 따먹다가 걸음이 쳐지면 언니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얼마쯤 걷는지 모른다. 고갯마루를 올랐다 내려갈 때 서울우유 공장 입구가 나타난다. 그쯤이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한국일보 그림 그리기 대회에 이 장면을 그려냈다가 상을 받았다. 다음 해에도 같은 대회에 같은 그림을 냈는데 또 상을 받았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깍두기공책에 한글을 네 바닥씩 쓰는 숙제를 내줬다. 공책은 금방 가득 찼다. 어떤 아이들은 공책값을 아끼느라 쓴 것을 지우개로 다 지우고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에 새로 글씨를 썼다. 한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치기도 했다. 그때는 징검다리만 있을 때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라고 해서 어느 기와집에 다니기도 했다. 그 피아노학원 원장님이 선교원 원장이었으니, 마을의 유일한 사교육 전문가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샘내에서 살던 첫 집을 지나가야 했다. 그 집 근처에는 계절마다 파나 고추가 자랐다. 파꽃의 달큰한 냄새, 고추가 익어갈 때 나던 매운 냄새를 기억한다. 햇빛은 빛나는 것이라면 모두 깨버릴 듯이 따가웠지만, 익어가는 열매에 닿을 때마다 반짝였다. 마을에서 놀다 해가 지기 직전 가장 뜨겁던 공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은 나무에 기어올라가길 잘했고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소만큼 커다란 개가 있는 집도 있었고, 어느 집에 가도 먹을 게 있었다.


그 동네에서 2학년이 된 뒤 신애네 집에도 월세를 밀렸던가. 아마 이사를 나가야 했는데 엄마가 버텼겠지 싶다. 비 오는 날 군인가족이 이사를 들어왔고 우리는 파란 트럭에 짐을 급하게 실어 의정부로 이사를 나갔다. 엄마는 신애엄마가 자기를 쫓아냈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엄마는 샘내에서의 치욕을 회복하려는 듯이 10년 후 다시 양주로 이사했다.


샘내에서 살았던 일곱 살 무렵은 내 인생에서 가장 지독하게 가난했던 때다. 하지만 그때의 샘내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파꽃이나,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그 위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잠자리 떼, 처음 이사한 집을 내려다보던 커다란 소나무, 나무를 타고 놀던 동네 언니의 이마에 내려앉던 노을과,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소가죽까지. 샘내상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에 닿으면 모두 녹아내렸던 그 여름의 신작로도, 모두가 찬란하게 빛났다. 가난하다는 건 충분히 슬픈 일인데, 알록달록한 지붕들 때문이었는지, 겨울에도 반짝이며 흐르던 냇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몇 년 전 경기도 양주에 복지관 강의가 있어 몇 달 동안 매주 양주에 갔다. 종강하는 날 참가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샘내에 들렀다. 냇물은 예전 같지 않았고 고추밭과 파밭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초등학교도 생겼다.

친구들이 타고 올랐던 느티나무는 보호수가 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나무를 보며 한 번도 나무에 오르지 못했던 나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신애네 집은 어디께 인지 찾을 수 없었지만, 선교원이 있던 교회, 우리가 처음 살았던 집과 마지막 살았던 집이 남아있었다. 바위도, 소나무도 여전했다.

우리가 처음 살았던 그 집 앞에는 백일홍이 가득 피어 있었다. 수많은 나비가 꽃 위를 날아다녔다. 나비가 그렇게 많은 장면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나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꽃 위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비했다. 샘내라는 마을과 샘내에 살았던 나의 유년기에 내리는 축복 같았다.

떠나온 마을을 다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마을에서 일어났던 흐릿한 기억들이 가끔 나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은 아닐까. 땅과 하늘이 빚어내는 열매와 사람들의 땀 흘리는 노동을 처음으로 내게 알려준 샘내는 여전히 반짝였다. 샘내를 기억하는 나에게 아름다운 일이 펼쳐지길 기원했다.

마을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내가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를 때, 샘내는 더 아름다웠다. 나의 가장 반짝이던 작은 마을, 샘내를 기억한다.

image.png [샘내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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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도로 쪽을 바라보는 가게가 나란히 두 개 있었다.

2) 평화로

3) 회천도시첨단산업단지 개발지구 (평화로워 철도 사이)

4) 평화로 1233번 길 부근

5) 샘물교회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 '수요일엔마프'

수요일엔마프 마을큐레이터 이하나(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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