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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Apr 16. 2022

EP5. 이종의 자격증

술잔이 채워진다.

술잔을 비운다.

술잔이 채워진다.

술잔을 비운다.

술잔이 채워진다.

술잔을 꺽는다.

"야, 꺾어 마시냐?"

술잔을 비운다.

술잔이 채워진다.

"저 내일... 시험이..."

"야야, 시험장 바닥에 떨어진 거 주워오면 돼, 마셔"

술잔을 비운다.


대학시절 우리 본종의 자격증은 시험 전날 술을 진탕 마셔야 취기로 주워올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실제 선배들에게 붙잡혀 술을 마셨고, 합격에 겨우겨우 턱걸이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일이 시험이라며 부탁했지만 찰랑찰랑한 술잔으로 돌려받았을 것이다. 돌아온 기숙사에서 취기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술술 공부되었던 건 간절함의 주사였을 것이다.

그런 알량한 유언비어를 곧이곧대로 믿고 졸업할 때까지 낙방이 버릇이 된 동기 녀석들도 몇 명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족보 몇 장 밑줄 긋는다고 될 거라고 생각했냐?! 그래도 시험 전날 기숙사의 거의 대부분의 녀석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던 걸 보자면 무지몽매한 상아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본종의 업에 몸을 담고 있을 때, 가끔 이종의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왔었다. 진골 정도라면 서럽지도 않았을 텐데, 종이 다른 영역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로 자칭 성골이라고 거만 떠는 우리들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지금에서야 완전 능력위주로 바뀌었지만 우리 세대, 더 나아가 그 일전의 세대에게는 그 차이가 더욱 심했으니 정점에 올라 본종들을 부리는 몇몇의 이종 출신 부서장들은 얼마나 많은 풍파를 해치고 피땀 흘려 노력했을까?


 ♬삑, 삑, 삑, 삑

지게차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포크를 올렸다 내렸다 바쁘다.

김 사장님, 이 사장님, 박 사장님, 최 사장님, 정 사장님, 강 사장님, 조 사장님... 강의실에 15명 남짓 수강생들은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제 막 사회에 발 딛는 젊은 친구들 반, 그 위로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까지 다양한 연령대 반.

후자 쪽은 대부분 자의든 타의든 본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분들이다. 중국을 상대로 무역하고 소매상을 하다가 코로나의 타격으로 할 수 없이 넘어오신 사장님,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을 운영하셨던 사장님, 아직도 부대원들과 연락한다며 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소령 출신 사장님, 집사람이 약사라 취미로 이것저것 따러 다닌다며 각종 자격증 취득 정보에 해박한 사장님. 그들 틈에 껴서 나도 본종이었던 업을 읊조렸다.


"아이고, 거기 있지 뭐하러 나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다. 연륜으로서 이종의 설움을 자연스레 아시는 것일 게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어른이 말씀하시니 만약을 대비해서 따놓는다며 맞장구 처 드린다.


사장님들 모두 열의 있게 수강해서 그런지 우리 반은 전원 '지게차 운전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축하 메시지가 왔다갔다한 단톡방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진심으로 "하시는 모든 일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이종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것저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윤곽이 잡혀가지만 수익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선은 본업만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종으로서 여러 가지 자격증이 필요하다. 투잡, 쓰리잡은 뛰어야 한다.   

이종이라고 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만치 않다. 필기시험을 통과했지만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실기, 자동차 정비기능사 실기시험이 남아 있고, 소방안전관리자 1급, 보세사 시험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필요한 자격일 뿐이다. 이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닥에서 기어 다닐 각오를 해야 한다.


마침 얼마 전에 차가 고장나 일부러 유명한 카센터에 들어갔다. 사장님이 참 좋으신 분이다. 기름쟁이 출신으로서 보건데, 보통 포기하고 버리는 것도 뚝딱뚝딱 돌아가게 만드는 멋들어진 분이라 멘토로 삼고 싶은 분이다. 꼼꼼히 작업 부위를 살피시는 사장님께 자동차 정비기능사 필기를 땄는데 실기수업을 받을지 말지 고민이라며 넌지시 물었다.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닌데 추천은 좀... 돈이 안돼서 힘들 거예요"

사장님이 말씀해주신 현실적인 부분을 예상했지만 힘들고 험난함에 약간 망설여 진다. 특히 일한 대가로 받는 돈으로 따진다면 더더욱...


본종으로 복귀의 끈은 끊어지지 않은 체 남아는 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임박해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우선 계획했던 일이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기로 했다. 사장님께 자주 놀러 오겠다며 그래도 실습 학원은 다니겠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쪽에도 면접 보러 오라며 화답해준 사장님께 90도 머리를 조아리며 정비 완료된 차를 끌고 나왔다.

손님으로서 찾아왔지만 이종으로서 바라본 일터


피땀 흘릴 각오는 돼있다. 하지만 우선 능력이 아닌 자격은 넘어놔야 하기에 하루 일과표에 학원 수강 및 공부계획을 빽빽이 적어본다. 이 미천한 백수는 언제쯤 여유가 생길까 한탄해 본다. 하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내가 원했던 바쁨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양해는 구해야겠다.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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