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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Apr 09. 2022

EP4. 쌍꺼풀 수술 요즘 얼마야?

버킷 리스트를 지우다.

"윽..."

"아프셨죠? 실밥 하나가 안으로 끊어져서요. 빼내다 살짝 상처가 났어요. 고 부분만 2~3일 더 연고를 바르세요"

간호사가 약간 실수한 듯 보였다. 하지만 따져 묻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안도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눈꺼풀의 한땀한땀 찌릿한 아픔으로 맞잡은 두 손에 땀이 흥건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났기에 너그러워졌을 것이다.


실밥 제거 후 세면대 거울에 비치는 한층 자연스러워진 모습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직은 이물감이 있지만 사십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드넓은 시야에,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을 거라 다짐했던 강남 한복판이 평화로운 잔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된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를 스윽 지웠다.

'쌍꺼풀 수술 하기'


"쌍꺼풀 수술 요즘 얼마야?"

각종 정보들과 눈치싸움이 난무하는 엄마들 사이에서도 유독 인간관계가 좋은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태생적으로 월등한 쌍꺼풀을 가지고 있는 아내라 그런 정보는 필요 없겠지만, 모임에서는 차고 넘칠 거라 생각했다.


"글쎄?... 왜? 당신 쌍꺼풀 수술하려고? 그래, 당신은 좀 해야 해. 이것 봐 이거, 처진 눈 좀 봐. 도대체 앞이 보이긴 하는 거야? 호호호. 아, 맞다! 저번에 ** 네(첫째 딸 친구) 아빠가 쌍꺼풀 수술했다던데 그 엄마한테 물어볼게"

역시 정보통이다. 남성 맞춤형 정보로 견적에서부터 진행과정, 주의사항까지 한 보따리가 아내 핸드폰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서 얼마래?"

아내가 재잘재잘되지만 크게 관심 없다. 관심사는 총비용이 얼마냐는 것이다.

"여기가 다른 데보다 좀 비싼데, 쌍꺼풀 수술만 전문적으로 한데. 추천받아서 가면 좀 싸게 해 준다는데?"

"너무 비싼데..."

요즘은 흔해 빠진 시술 정도고 몇십이면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가격을 듣고 났더니 놀랠 노짜다. 안검하수 증상으로 보험 처리되지 않을까 알아도 봤다. 나 정도는 해당이 안 될 거라 한다. 얼마 뒤 회사를 때려치울 건데 생각지도 못한 고비용에 살짝 고민이 됐다.


"자기야, 비용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앞으로 얼마나 시원할 건지를 생각해!"

"그게 낫겠지? 그래 진행하자"

대인배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핸드폰에 버킷리스트를 하나 추가시켰다.

'쌍꺼풀 수술하기'


나이가 들면서 눈꺼풀이 쳐져 가뜩이나 작은 눈인데 시야가 더 좁아졌다. 그 불편함이 몇 년 전부터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뭘 보기 위해 집중하려면 이마를 들어 올려 시야를 확보해야 했다. 피곤함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또 눈꺼풀이 무거워 졸음이 쉽게 쏟아졌다. 상상 속에서 눈꺼풀로 가위질을 얼마나 해댔는지 모르겠다.   

퇴사 결정 후에 작성하던 버킷리스트에 쌍꺼풀 수술은 그렇게 상위 포지션일 수밖에 없었다. 비용이 얼마가 들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얼마나 잔소리를 하던, 셋째 딸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이 겨우겨우 웃음을 참아내던 상관없었다. 사십 평생 내내 불편했었고, 나머지 인생을 탁 트인 시야에서 살기를 바랐다. 쌍꺼풀 수술에 대해 아내에게 답정너로 다가갔지만 그녀가 흔쾌히 공감해 준건 다행이었다.


버킷리스트, Bucket List... 이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면 참 무시무시하다. 교수형 할 때 딛고 서있는 양동이를 발로 찼다는 관행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Kick the bucket...


삶의 끝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적어놓은 버킷리스트가 많다. 인생 1막에서 소심한 나라면 기우스런 두려움에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을 항목들이 대부분이다. 나름대로 고차원적 위험성평가를 해대며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들을 제쳐두기 일쑤였다. 지금 적어놓은 리스트를 보면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핑계가 다분히 적용되는 사항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을 시도하고 있다. 일단 발을 담가보니 어쨌든간 비슷한 쪽으로 도달하기는 한다. 두려움에, 남 눈치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해보는 것이 낫다고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막 질러 보는 것들은 아니다. 위험성평가는 지속할 것이며, 그 수치를 관리하고 대비하는 것은 유지할 예정이다.


퇴직하고 98일, 그러니까 3개월 넘는 긴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하지만 풍성하게 채운 시간들이다. 그리고 백수로 생존이 가능한 몇 개월의 시간이 더 남아있다. 남아있는 버킷리스트가 시간 안에서 버거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회사생활 때의 조바심은 아니다. 빨리 해보고 싶은 설레임이라고 할까?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에 좌절할 수도 있다고 예상해본다. 하지만 잠시 움츠렸다 훌훌 털고 일어난다면 그만큼 성장해있을 거라 희망을 가져본다. 그렇게 버킷리스트를 모두 해내는 임계점을 돌파해보려고 한다.


버킷리스트 상단에 위치해있던 쌍꺼풀 수술은 그렇게 아내에게 비용견적을 받아본 후 5개월이 지난 4월 초에나 하게 됐다. 수술 전날 떨리는 마음으로 잠든 것은 참 부끄럽기도 하다. 다 큰 어른이지만 병원, 주사, 수술은 언제나 무섭다.

수술방에 조명이 눈을 비치고 심장박동 체크기가 삑삑 돌아가기 시작한다. 수술 준비하는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따뜻한 수술 담요가 덮어지고 "이제 마취약 들어가요, 계속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잠깐 자고 일어나실 거예요" 그리고 웅웅웅... 눈앞이 뿌예지고, 구름이 뭉개 뭉개 피어오르고, 산이 솟아오르고, 별이 휘몰아친다.


"환자분 눈 떠보세요. 네, 좋습니다. 다시 감으시고요"

"환자분 눈 떠보세요. 여기 보시고요. 네, 다시 감으세요"

"환자분, 뻐근할 수 있어요, 힘 빼시고요"

쓱쓱 잘리는 예리함과 찌지직 살타는 냄새와 꼬매는 당겨짐이 마비된 피부를 통해 전해온다.

청각과 후각으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연출된다.

'이러다 마취 풀리는 건 아니겠지, 느끼지 말자 느끼지 말자'

쓱쓱 싹싹 찌지직 찌지직, "환자분 힘 빼세요", "눈떠보세요, 감으시고요"

.

.

.

누가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어?!... 한 시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수술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다리던 아내가 나를 보고 웃음을 참고 있다. 짠하긴 한데 발랑 까진 눈꺼풀이 너무 웃기다나?...


예상은 했지만 부어있는 쌍꺼풀과 연고 등으로 눈 충혈이 심하고 따갑다. 눈알이 굉장히 예민한 편이다. 한 때 안경을 벗고 싶어 콘택트 렌즈를 시도해봤지만 그 예민함에 실패했다. 미리 맞춰논 비싼 렌즈가 쓰레기통에 들어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눈을 건드리는 수술을 했으니 오죽 난리겠는가? 역시 새로운 시도는 시련이 반드시 존재한다.


버킷리스트 중에는 자격증 취득도 포함돼있다. 지게차 운전 기능사 실기시험, 자동차 정비 기능사 필기시험이 있었다. 시험공부를 핑계로 독서, 독후감을 뒤로 미뤘다. 쌍꺼풀 수술 후 책을 잡아 봤지만 역시 충혈된 눈으로 오래 보기가 쉽지 않았다. 실밥 제거 전까지 힘쓰거나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거의 매일 하던 독서와 운동을 하지 않으니 무기력 해졌다. 약간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다행히도 버킷리스트에 '슬럼프 빠르게 극복하기'가 있다. Resilience, 회복탄력성 고취!  실밥 제거에 충혈된 눈이 잠잠해졌고, 잠시 멈췄던 독서를 시작했고, 글쓰기에 돌입했다. 다시 바쁜 백수의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믿는다. 이렇게 또 버킷리스트를 하나 실행한다.


미용을 목적으로 수술은 아니지만 간절히 예쁜 눈이 보상으로 주어지길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수술 직후 강남역 사거리에서... (아내와 초상권 협상이 되지 않아 모자이크 처리합니다)

대단한 수술도 아닌데 한동안 무거운 것도 못 들게 하고, 손하나 까딱 안 하게 아기 다루듯 챙겨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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