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으로 들어오자 뭔가 달라졌다. 평소보다 환해져서 기분이 산뜻하다. 천장을 둘러보니 조명등을 교체했다.
이제야 관장님이 정신 차리고 체육관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사실 신정철 복싱 체육관에 다니는 동안 어리숙한 운영에 대해 건의를 꽤 했다.
관장님은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와 대화 중인데 신입 관원 상담은 아닌 것 같다. 그녀가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관장님은 심각하게 듣고 있다.
유년부 남자아이가 관장님에게 안겨 있다. 똘똘한 눈동자가 너무 귀엽다. 딱 보기에도 손주다.
할아버지의 포옹이 부담스러운지 자꾸 팔을 뜯고 빠져나가려고 한다.
나는 가벼운 눈인사로 등관 도장을 찍는다. 왠지 고개만 끄덕거리는 관장님의 태도에 먹구름이 짙다.
이른 시간에 와서 그런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관원은 아무도 없다. 평소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탈의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며 사물함을 둘러본다.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되는 곳이 없다.
학생들은 주머니에 뭐가 들었든 옷가지를 대충 구겨 넣고 운동한다. 다행스럽게 이제까지 탈의실에서 도난사고가 난 적이 없다.
하긴 도둑놈도 이런 체육관은 노리지 않을 것이다.
사물함 교체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어쩔 수 없어도, 이번에는 물이 사방으로 튀는 샤워기 헤드 수리를 해달라고 요청해야겠다.
관장님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벌써 겨울이다.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의 옷차림이 두툼하다. 가로수는 잎을 떨어뜨리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신정철 체육관에 다닌 지 거의 1년이다. 재등록 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까 따님이죠?”
거리를 굽어보는 관장님의 얼굴이 심각하다.
“어떻게 알았어?”
“보니까 관장님 딱 닮았어요.”
곧장 얼굴이 펼쳐지면서 기분 좋은 웃음이 지나간다. 자식이 나 닮았다는 말을 싫어할 부모는 없다.
“따님이랑 뭔일 있어요?”
“그건 왜 물어?”
관장님의 반응이 물렁하다.
“아까 대화를 나눌 때도 그렇고 뭔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이런 사생활도 서먹하지 않게 물어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기분을 추스르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손목에 찬 시계가 겨울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반짝거린다. 정아에게 밟혔던 명품을 수리해서 잘 차고 다니는 중이다.
“손목은 괜찮아?”
내가 그의 손목시계를 주시한 것을 의식했는지, 이번에 관장님이 내 손목을 바라보면서 묻는다.
얼마 전 글러브를 끼지 않은 채 샌드백을 치다가 손목을 다쳤다. 맨손으로 치는 타격감이 좋았다. 한동안 머저리 같은 놈이라는 구박을 들어야 했다. 관장님은 부상에 민감했다.
인대가 늘어났다고 하는데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도 낫지 않았다.
그게 안쓰러웠는지 관장님은 ‘호랑이 기름’이라고 육각형 플라스틱 연고를 갖다 줬다.
겉면에는 한자만 수두룩하다. 태국으로 원정 갔을 때 사 온 거라고 한다. 그러면 언제부터 보관하고 있던 연고인지 아득하다.
어릴 때 동네 어른이 멍든 아이에게 발라주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다.
안티프라민이나 맨솔레담 같은 소염 연고인데, 당시에는 그런 연고도 희귀했고 ‘호랑이 기름’이라는 명칭 때문에 괜히 대단하게 보였던 것 같다. 호랑이 뼛가루가 들어갔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
“많이 나아졌어요.”
나는 손목을 들어 빠르게 돌린다. 찌릿한 통증이 스친다. 침을 맞아도 낫지 않았는데, 연고 발랐다고 좋아질 이유가 없다. 그저 관장님의 배려에 호응해주는 것뿐이다.
흐릿한 웃음이 지나간 뒤 관장님이 얼굴이 다시 어두워진다. 천장의 조명이 그곳에만 비추지 않는 걸까?
“딸내미가 남편이랑 빵집을 하는데 건물주가 보증금을 올린대. 길바닥에 나앉게 됐어. 좀 봐달라고 하지만 영 먹히지 않나 봐. 관원도 없는 이 체육관을 접고 목돈 좀 달래.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얼핏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장님은 뭐하시고요?”
“같이 살재. 손주 좀 봐주면서. 아까 걔 밑에 남동생이 더 있어. 식구가 4명이야.”
그러다가 아이들이 좀 자라면 관장님을 요양원에 보내겠지.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던 유망한 권투 선수가 이렇게 초라하게 매듭을 짓는구나.
링에서 애국가가 흐르는 가운데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이 손을 얹던 그가 떠오른다.
“요즘 체육관이 워낙 안 되잖아.”
당연하지. 그렇게 운영하는데.
한코치도 조만간 군입대를 할 예정인데, 이런 체육관에 제대로 된 코치가 자리를 잡을까 의문이다.
나는 창밖을 향해 한숨을 크게 터뜨린다. 저 거리를 날려버릴 것 같다. 가슴 속 찌꺼기가 전부 빠져나간다.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다.
그런 행동이 우스웠는지 관장님이 가볍게 내 가슴을 친다. 역시 세계 랭킹 1위, 주먹이 빠르고 간결하다.
“왜 네가 인상을 쓰고 난리냐?”
며칠 뒤 체육관으로 들어오자 관장님이 큰 목소리로 윽박지르고 있다.
아저씨…… 복싱 잘해요? 하면서 스파링을 했던 주엽이 야단맞고 있다.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의아하게 여기면서 들어보니 내용이 좀 그렇다.
수업을 마친 주엽이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집으로 가는 도중이다.
복싱 체육관에 간다고 하니 날라리 같은 놈이 시비를 건다.
평소 운동 신경이 좋아서 체육 선생님에게 주목을 받던 녀석이다. 가끔 일진과 어울려 다니는 광경을 봤다. 네가 쎄냐고, 한판 붙어보자고 하면서 괜한 시비다.
날라리가 복싱 선수 흉내를 내면서 주먹을 휘두른다. 덤벼 보라는 식이다.
주엽의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때리자니 사건이 커질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자존심 상하고, 나중에 또 시비를 걸 것 같고.
무엇보다 이런 녀석에게 복싱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
어쩔 수 없이 메스 스파링 식으로 주먹이 살짝 얼굴을 스치도록 뻗는다. 잽, 레프트 훅, 날라리가 왼쪽 주먹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라이트 스트레이트.
날라리가 허리를 젖히면서 당황하는 기색이 짙다.
기 죽지 않으려고 날라리도 주먹을 휘두른다. 느리고 마구잡이다. 주엽은 위빙 더킹으로 슬쩍슬쩍 피한다. 눈은 똑바로 그 녀석을 바라본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서로 주먹을 내렸지만, 더 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철들었구나, 그 정도에서 멈춘 주엽을 칭찬하고 싶은데, 관장님은 그게 아니다.
“제대로 쳤어야지! 너한테 가르쳐준 거 하나 뭐 있어. 바싹 붙어서 어퍼! 어퍼를 올렸어야지. 제대로 보여줬어야지.”
청소년 지도원으로 나갔던 양반이다. 자기가 가르치는 관원이 시비에 걸리자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그 어퍼가 스파링 도중에 내 낭심 근처를 때렸던 기술이다.
하긴 무턱대고 덤비는데 가만히 있으면 계속 만만하게 볼 것이고…….
예전에 관장님과 작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학교에서 왕따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장님은 한결같은 태도다.
“자기 힘을 길러야지. 너는 요즘 학교가 뭐라고 생각해? 교육기관? 그래, 교육기관은 맞지. 그런데 무슨 교육기관이야? 자기 출세 교육이잖아. 어떻게든 자기 잘 살려고. 네가 근무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거 다 그것 때문이잖아.”
너무 치우친 것 같아서 내가 누그러뜨린다.
“꼭 그렇게만 볼 수 없잖아요.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무엇보다 청소년 시기에 자기 인성을 키우는 곳이잖아요.”
“물론 인성 교육도 해야지. 하지만 자기가 살아야 인성이 있는 거야. 맨날 매점에서 빵셔틀 당하는 아이가 인성이 있어? 국제사회에서 국력이 없으면 까이는 거랑 똑같잖아. 자기를 지키려면 자기 힘이 있어야 해.”
“아무리 노력해도 힘이 생기지 않는 아이는요? 키가 작고, 용기도 없고, 힘도 없는 아이는요?”
관장님의 말문이 막힌다. 하긴 평생 때리는 쪽에만 있던 그다. 맞는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국제 정세가 그렇다 해도 우리 사회까지도 안 되잖아요. 여기 체육관도 복싱 실력으로만 서열을 나누지 않잖아요.”
“하여간 자기 방어 기술은 있어야 해. 어디서든 꿀리지 않게. 최소한 주먹 휘두르는 법이라도 알면 찐따로 대하지는 않아. 용기 있게 맞서봐야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야. 세상은 원래 잔인한 거야.”
관장님은 가드를 바싹 올리면서 주엽에게 어퍼 치는 방법을 다시 가르친다.
“때릴 때는 확실하게 조지란 말이야. 봐주면 안 돼. 자기 힘을 보여줘야 나중에 넘보지 않아.”
아마 관장님이 어린 시절부터 배우던 생존 방식이라고 여긴다. 중학생인 주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청한다. 주엽은 어른이 돼서도 이 방식대로 타인을 누르면서 살아갈까.
그 모습에서 얼마 전 관장님의 품에 안고 있었던 손주가 떠오른다. 빵집 보증금 때문에 이 체육관을 팔아버리자고 하던 딸도 떠오른다. 서로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면 안 될까.
어쩌면 그 잔인한 세상은 누구도 아닌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나도 역시 마찬가지고.
세상을 힘의 원리로 매정하게 만들어 놓고, 내 아이는 정이 넘치는 학교로 다니게 하려는 어른들의 환상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