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회

by 은빛바다

휴대폰이 울린다. 의외로 혁진의 이름이 뜬다.


“형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안부를 묻는다. 반갑고 또 씁쓸하다. 노관장 때문에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한 채 올스타에서 나왔다.


가끔 내가 그런 식을 체육관을 끊은 게 잘한 짓이지 돌이켜보고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좀 더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오랫만이야. 잘 지냈어? 복싱은 계속 하고 있어?”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나와서 운동하고 있어요. 고철상이 망하는 바람에 이직했거든요. 형님은 안 보이시더라고요. 복싱 그만두셨어요?”


다른 복싱 체육관에 다닌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휴대폰에서 혁진이 묻는다.


“형님, 아예 복싱을 그만 두지는 않은 거죠?”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뚫지만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


“혹시 다른 체육관에 다녀요?”


뭐라고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추궁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배신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한번 들리세요. 체육관에 갑자기 형님 없어지니까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요.”


혹시 노관장과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의혹이 일어난다. 그의 청탁을 받아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다.


“노관장은 잘 지내?”


불쑥 던진 질문에 휴대폰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고인다. 확실히 뭔가 알고 있기는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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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는 잘 지내는 것 같아요. 직접 만나서 인사 나누세요.”


직접 만나보라, 대충 짐작이 간다. 이것은 화해를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관장 입장에서는 체육관에 관원이 한 명이라도 더 나와 운동하면 좋지.


“노관장이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고. 생활 복싱하다가 코치가 되었다가 체육관을 차린 거라며?”


여관 종업원이라는 말까지 하지 않는다. 아직 돈을 꿔달라고 하고, 신경질적으로 펀칭볼을 치던 그가 떠오른다. 앙금이 남아 있다.


“어?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러고는 무슨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면서 뻥이나 치고.”


괜히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복수를 한 건 아니지만 꼬였던 속이 좀 풀린다.


창곤이, 서코치도 계속 올스타에서 운동하고 있다. 조만간 버팔로와 다시 정기전을 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준다.


“저 운동하는 시간은 알죠? 나중에 문자로 연락하고 놀러 오세요. 간만에 술이나 해요.”


전화를 끊는다. 혁진이 전화를 건 배경 뒤에는 분명히 노관장이 있다. 이거 올스타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어색하게 문을 열자 올스타 복싱클럽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조명은 화려하다. 똑같은 운동복을 입은 관원들이 링에서, 샌드백을 치며, 헬스 기구를 당기면서 땀을 흘리고 있다. 아직 혁진은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체육관 알아보러 오셨나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질문을 던지는 여성 코치가 낯설다. 복싱 관원도 여성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고향에 온 기분이다. 내가 복싱을 시작한 곳이다.


버팔로 복싱과 친선 시합에서 헤비급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박코치가 한손으로 턱걸이를 한 철봉이 여전히 걸려 있다.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체육관은 잘 운영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문을 탁, 닫고 돌아섰던 사물함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여기 다녔어요. 노관장은 어디에 있어요?”


여성 코치가 바라보는 곳에서 노관장이 아이들의 미트를 받아주고 있다.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벽거울로 나랑 눈이 마주친 노과장이 곧장 미트를 접는다. 아이들에게 체육관 세 바퀴 돌라고 지시를 내린 뒤 다가온다.


그중에는 친구에게 맞아가며 복싱을 배우던 전국 2등도 있다.


“형님, 오셨어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노관장이 두손으로 악수를 청한다. 예전 태도에 대해 사과하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나이 먹고 그렇게 성질을 부리며 갈라서는 게 아닌데, 은근히 반성하게 된다. 이제 다 지난 일이 돼 버렸다.


노관장도 그 사건이 마음에 걸렸는지 혁진을 시켜 전화를 건 것이다. 어쩌면 내가 혁진과 통화할 당시에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지내세요? 복싱은 계속 하세요?”


과장되게 밝은 웃음을 띄지만, 노관장의 그런 태도가 싫지만 않다.


“그냥 그렇게 지내. 등산도 다니고…….”


“계속 하셔야죠. 다시 시합도 나가시고요.”


고민된다. 사실 진태에게 복싱 체육관을 같이 다니자고 제안했다. 기본으로 호신술 하나 정도는 익히게 하고 싶고, 다 큰 아들과 같이 운동하는 맛도 즐거울 것이다.


운영은 신정철 복싱 체육관보다 이곳이 휠씬 낫다.


“오셨으니까 땀 좀 빼고 가세요. 제가 아이들 가르치는 중이라 이따가 같이 커피 마셔요.”


체육관을 뛴 아이들이 벽거울 앞에서 정렬하고 있다.


“강코치, 전에 우리 체육관에 다니던 형님이예요. 1일 이용권으로 해줘요. 돈은 받지 말고.”


노관장이 여성 코치에게 지시를 내린다.


체육관에서 1일 이용권 프로그램을 따로 만든 것 같다. 아마 운동복과 글러브 대여에 간단하게 미트를 받는 것으로 진행하는 듯하다.


예전에 여관에서 잡일을 했다고 하지만 노관장의 영업 수완은 뛰어나다. 다이어트 성인 여성프로그램을 따로 개설했다. 복싱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주로 크런치, 레그레이즈, 플랭크 등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로 진행하고 있다.


그녀가 운동복을 챙겨주려고 하기에 나는 손을 저었다. 등록한 관원이라면 모를까, 여기에서 운동을 하기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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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코치는 연락이 오나?”


연상 여인과 결혼해서 고향에 복싱 체육관을 차렸는데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노관장 얼굴이 밝아지면서 지난 가을에 체육관으로 놀러 왔었다고 알려 준다.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들이 체육관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박코치는 체육관 운영은 그럭저럭 되는 편인데 도시로 나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스를 얻으려고 노관장을 만나려 온 것 같았다. 어쨌거나 잘 살고 있다니 기분이 흐뭇했다.


글러브를 빌려 혁진을 기다리는 동안 샌드백이나 칠까 궁리하는데 저쪽에서 큰 덩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규한을 왕따 시키던 경찰이다. 그 동안 살이 좀 쪘다. 나는 경계심이 일어나 주춤 물러선다.


“형님, 오랜만이예요.”


내 손을 잡고 흔든다. 너무 반기는 태도에 얼떨떨하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다.


“요즘 안 나오셔서 많이 궁금했어요. 이제 운동하러 나오시게요?”


지난 일은 싹 잃어버렸다는 식이다. 어쩌면 그게 옳은 태도 같기도 하다. 예전 감정을 다 가슴에 담고 다니면 인간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털어버릴 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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