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코네티컷
코네티컷은 미국 동부, 뉴욕과 보스턴 사이에 있는 작은 주다.
무려 백인 비율이 75%일 정도로 인종 다양성이 높지 않은 곳이면서, 주변에 아이비리그 대학교(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가 있어 엘리트들이 많이 살고, 1인당 소득 기준으로는 미국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매우 부유한 주다.
2019년, 나는 이곳 Fairfield라는 대학교 교환학생으로 머물며 4개월을 보냈다. 미국은 여행이 아닌 살고 싶은 곳으로 마음 한편에 늘 남아있었는데, 그 꿈을 이루게 된 것!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의 그 쾌감을 잊을 수 없다.
인지도도 없는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딱 2가지였다. 한국인이 없는 곳, 그리고 뉴욕과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페어필드 대학에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민 2세대였던, 영어를 한국어보다 편해했던 간호학과 교포 언니를 제외하고는 내가 학기 내내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동양인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학급생들을 포함한 코네티컷 사람들은 동양 문화를 매우 낯설어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한류 청정구역"이었다.
1월에 도착한 코네티컷은 뼛속까지 시리게 추웠다. 도보 3분 거리인 카페테리아에 가려고 슬리퍼를 신고 나가면 발가락이 얼기 직전에 식당에 도착했다. 어떤 날에는 심한 눈폭풍이 불어서 모든 수업이 취소되기도 했다. 눈보라를 뚫고 걸으면, 뒤에 걸었던 내 발자국이 덮여서 흔적이 바로 사라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미동부에도 4월이 되니 추위가 가시고 꽃이 폈다. 아마 겹벚꽃이 아니었을까.
부유한 학교는 학식부터 달랐다.
점심, 저녁이 모두 뷔페식이었는데, 샐러드 코너부터 각종 고기, 오믈렛 코너, 디저트 코너, 그리고 글루텐 프리 코너까지 웬만한 뷔페식당보다 맛있는 메뉴가 매일같이 카페테리아를 가득 채웠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사먹어보지 못한 잘 익은 아보카도와 연어를 집중적으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이렇게 몇 개월간 꾸준히 잘 먹어본 적은 없었다. 매일이 다채로운 음식의 향연이었다. 페어필드 교환학생 기간 동안 내 행복의 4할은 책임졌던 학식.
학교에 오래 다녔던 친구들은 늘 똑같은 음식이 나온다며 불평하는 것을 보고, 혹시 나도 분에 넘치는 감사함을 모르고 지나쳤던 적이 있나 되돌아보기도 했다.
학교 안에는 칠면조부터, 사슴, 청설모, 코요테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자유롭게 잔디를 거닐었다.
서울에서 온 나에게 이곳은 미니 동물원 같았다. 뿔 달린 사슴이 학교 잔디를 뜯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까지 완벽했다. 사람의 터전과 자연의 터전 사이 경계가 모호한 이런 환경이 싫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랫동안 원인을 몰랐던 만성질환 하나가 완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미국이라고 해서 모든 게 자연친화적이진 않다. 페어필드 대학교는 재활용 시스템이 전혀 없었다. 많은 것이 풍족한 만큼 버리는 것도 쉬운 이들이었다.
또 하나 사랑에 빠진 것은 페어필드의 노을이었다.
주변에 큰 빌딩이 없다 보니 시야가 탁 트여서, 사방으로 하늘이 시원하게 보였다. 게다가 차도 많이 없는 시골 마을이었기에, 소음 하나 없이 오롯이 해가 저물며 색이 바뀌는 하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내 기억처럼 노을의 모습이 매일 달랐던 건지, 아님 내가 정말 콩깍지가 씌었던 건지 모르겠다. 붉은 하늘은 매일 봐도 내 마음에 새로운 불을 지펴줬다.
미국에서 "파티"라 함은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창한 파티가 아니다.
그저 친구네 집에서 보드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것이 파티. 한국에서는 주점이 워낙 많고 늦게까지 영업할뿐더러, 집 공간이 작고 아파트 형식이라 층간 소음에 예민해서 이런 문화가 없는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몇몇 미국 친구들과 함께 손병호 게임(Never Have I ever), Cards Against Humanity, What Do You Meme 등 지루할 틈 없이 밤을 보냈다. 대학생 시절 술 마시고 하는 술 게임 정도밖에 몰랐던 나에게 다양한 보드게임들은 느껴본 적 없는 재미를 선사했다. 보드게임은 모두 어려운 룰을 배우고 기억해야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기본적인 설명만 듣고 바로 참여할 수 있는, 서로의 성향과 유머를 알 수 있는 취향저격 카드게임들을 많이 알아갔다.
미국은 합법적 음주가능 나이가 만 21세 이상이다. 온갖 마약이 판을 치는 나라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미국 친구들에겐 술을 마시는 것조차 꽤나 큰 일탈이었다. 우리나라가 음주에 얼마나 익숙하고 관대한 나라인지 반대로 깨닫게 되는 일상들이었다.
게다가 페어필드 같은 시골 마을에는 차를 타고 주류상점에 가야만 술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럼 나도 맥주 몇 병만 사다 주면 안 돼?"
만 20살이었던 기숙사 룸메이트가 내가 주류점에 가는 걸 알고 수줍게 물었다.
"당연하지. 나에겐 네가 술을 직접 사지 못하는 게 인권침해같이 느껴지는 걸?"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고작 만 22살이었는데. 지난 2년 동안 내일은 없는 것처럼 성인이 된 나날들을 술과 함께 즐겼던 기억들이 떠올라, 룸메이트에게 대인배 행세를 했다.
"한류 청정구역"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한국인으로서 마냥 웃어넘기긴 어려운 순간들도 많았다. '한국'하면 북한과 김정은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인들은 평소 신경 쓰지도 않는 북한 얘기를 나에게 자꾸 꺼냈다. 재미로 북한말을 따라 해줬더니 사실은 북한 스파이가 아니냐며 그렇게 소름 돋아했다.
처음엔 새롭고 신기한 동양 문화를 좋아할 줄 알고 주변인들에게 한국 얘기(북한 얘기 말고)를 먼저 꺼냈었는데, 큰 오산이었다.
마치 지루한 교양수업처럼, 아무도 관심 없는 소재지만 예의상 들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몇 주 뒤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깔끔히 나의 근원을 버리고 주변인들이 공감할 수 있을만한 대화들만 주고받았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그런 뒤로는 친구들과 친해지는 속도도 빨라지고, 나 또한 미국문화에 빠르게 동화되는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이벤트들이 열렸다.
중국 설날,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밸런타인데이, 부활절, 만우절 등등.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에는 학식당에 초록색 풍선과 연두색 머핀이 깔였고, 부활절에는 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서 수업은커녕 학교가 텅 비었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나에게 영감을 준 여성을 꼽으라 해서 유관순 열사를 설명했더니, 감탄하시며 게시판에 커다랗게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붙여주셨다. 학교에서 '탤런트 쇼'를 열어서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개량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들 일도 있었다. 기숙사 멘토링 활동으로 학교 근처 산을 거닐며 크고 순한 강아지들이 자유롭게 강가에서 뛰노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도 했었다. 만우절에는 기숙사 운영진들이 작정하고 학생 모두를 속인 다음 저녁에 맛있는 간식을 돌렸다. 이 모든 이벤트가 단 4개월 만에 있었던 일들이다.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경험했던 "포켓 데이(Pocket-Day)"가 떠올랐다. 가장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 오는 학생에게 상을 주는 날이었다. 한국 학교에서는 상상이나 가능할까. 그런 걸로 학생에게 상을 준다는 것을. 그런 경험들이 모여 고작 1-2년 남짓했던 유년시절의 해외생활은 내 가치관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뭣이 중헌디.
시험기간에는 시험기간이라고 학교에 심리 안정 강아지들이 왔다. 어찌나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던지, 놀아주다가 떠날 시간이 되니 내가 나가는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라. 시험기간에 강아지 치료사를 모셔올 정도로 세심히 내 멘탈을 신경 써주다니. 미국은 초, 중, 고등학교도 이럴까? 내 미래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민을 고민하게 되는 나날들이었다.
물론 공부도 안 할 수 없었다. 코네티컷은 여행자가 아닌 학생으로 온 곳이기에.
신문방송학 전공, 심리학 부전공인 나는 국제관계학, 동양과 유럽, 다큐멘터리 위크숍, 영상편집, 성격심리학 총 5과목을 들었다.
미국 대학교는 입학은 쉽지만 졸업은 어렵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매주 과제가 쏟아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가장 큰 난제는 과제가 아니었다. 바로 라틴계 교수님들의 진한 억양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다. 이게 영어인지 스페인어인지, 진보주의라는 주제 자체도 어려운데 교수님의 강력한 억양은 국제관계학을 깨우쳐야 하는 나를 자꾸만 수면관계학으로 이끌었다.
이런 게 실전 영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라틴문화에 많이 노출되지 않았으면 남미여행을 선뜻 용기 내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신문방송학 전공자로서 가장 미국 학교에 감사했던 건 아무래도 전공수업들이었다.
카메라 사용법이나 영상편집 기술 같은 건 독학하라는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론만 배웠던 한국 강의들과는 달리, 페어필드 대학교에서 잠깐 몸 담갔던 "Film, TV, and Media" 전공 속 수업에서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영상 제작에 대해 배웠다. 오늘 컷편집을 배웠으면 다음 주는 교차편집, 그다음 주는 음향효과(SFX)를 배우는 등, 그 수업을 끝까지 들으면 혼자 영상제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한국에서는 독한 선배들의 냉철한 가르침과 이미 독학으로 모든 걸 마스터한 동기들 사이에서 쩔쩔맸었다면, 미국에서는 소규모 팀에 속해서 함께 조금씩 배워가며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소감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을 가졌다.
4개월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다.
혼자 한국인이었기에 외로운 점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미국에서 어떻게 하면 더 오래 남을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하고 알아봤던 것 같다. 인턴쉽, 대학 편입, 장학생 제도 등 여러 방면을 알아봤지만, 결국 나의 교환학생 비자는 더 이상 내가 미국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국 코네티컷주의 교환학생 라이프는 한 겨울밤의 꿈처럼 아득한 기억과 몇장의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음 챕터부터는 미국 거주 당시 여행 갔던 미서부, 플로리다, 뉴욕, 보스턴의 기록들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