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밀실 철학 05화

<나의 역사> 에필로그

by 김윤후

지긋지긋하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 느꼈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원래 나의 것이었던 것이 사라져 있거나, '거세'되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문제의 원인은 잊어버리고 대인관계 문제가 심화되자(또는 그렇게 느끼자) 나의 마음 속은 로라스인의 미로처럼 변해갔다. 기원도 모르고 출구도 모르는 그런 미로. 이 혼란을 잊고 싶어서 말초적인 자극들에 중독되고, 이 혼란을 해소하고 싶어서 <나의 역사>와 <songs of life>를 적는다. 또 이 혼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 음악을 듣는다.


광장: "나는 광장 없는 인간이다"

밀실: "A soul with no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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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밀실은 미궁이다. 그곳에는 구린내와 볼튼의 서자가 자해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완전히 죽어야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죽음보다 두려운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진짜 고통의 시작이자 진짜 행복의 시작점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미궁 속 무언가를 사랑한다. 그 무언가는 여러 모습을 한다. 그리고 생의 심장이다. 그곳으로 다가가면 주변의 가시에 찔린다. 그래도 다가간다. 그러나 무언가가 지꾸만 미궁 속으로 숨을 수록 나의 상처는 깊어진다. 그만큼 더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가 자해행위 자체를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그 무언가는 미궁 속에 숨겨질 무엇이 아니었다. 그것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찾아 나선다는 것 따위는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향해져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필요도 없는 목적 그 자체다. 그저 작품을 감상하듯이, 자연경관을 관조하듯이 보면 된다. 그것은 내러티브의 신화다. 신화의 신화다.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미 있는 것이다. 다만 움직이고 변모할 뿐이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본성상 그것과 나는 유리되지 않는다. 유리될 수가 없다. 유리되면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불가능한 유리를 이루어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버렸다. 그 무언가와 나 사이 불가능한 거리는 무한한 미궁이 되었다. 애착은 집착을, 집착은 미궁을 낳고 미궁은 자해와 무기력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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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제 미궁마저 사랑한다. 애착의 사생아에게 또 애착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애착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사랑에도 해결의 열쇠가 있음을. 그리고 그 열쇠는 솔직함과 자명함이다. 부조리에 대한 자명함을 지지한 카뮈처럼. 그리고 미궁이라는 불투명한 대상을 자명하게 다루려면, 그에 맞는 그릇에 담으면 된다. 그릇은 온갖 모양으로 빚을 수 있지만(불투명) 그릇 자체는 하나의 구조와 질서가 있다(자명함). 자명한 질서 안에 불투명한 신화와 미궁의 요소를 담는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라는 말 자체는 일종의 그릇이다. 진리란 가장 거대한 것인데, 그릇은 이 말은 가장 거대한 것의 표피가 되어 이를 담는다. 나의 미궁에 있는 이야기는 아직 끝맺히지 못한 이야기이기에 그 자체로 하나의 미궁이다. 자명함과 대비되는 미궁이다. 그렇지만 그릇을 통해 나는 이들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미궁에 대해 미련과 사랑이 섞인 감정을 느낀다. 나는 애착의 사생아들, 즉 내러티브의 끊어진 실들에게 끝을 맺어주고 싶다.

4cb6bd25-561c-4fb0-a2d7-20cdfd7853e9.jpeg 집착의 사생아인 미궁은 내러티브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는 갈등과 미로 속에서 엮여 탄생하기 때문이다.

본디 하나였던 것이 애착과 집착으로 분리되어 미궁이라는 안개를 만들었다. 미궁이 차지한 공허의 땅은 분리(detachment)의 땅이다. 그 사이에서 내러티브의 사생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그 사생사들에게 응당한 끝맺음을 주고 싶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일까. 나는 집착을 버린 것일까? 부처처럼? 아니면 그저 집착의 노예가 변명하는 것에 불과할까? 둘 다 아니다. 또는 둘 다이다. 나는 집착으로 이어지기 쉬운 미궁 속 사생아들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그릇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릇은 미궁보다 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 이상 미궁 속에 있지 않다. 부조리의 벽을 실감하는 실존적 인간처럼 나는 무한한 미궁을 담을 높은 차원의 그릇, 즉 자명함 위에서 미궁을 관조한다. 나는 미궁과 미궁이 아닌 곳 사이에 있다. 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필히 정착하거나, 파멸한다. 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항한다.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거나,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기에 부조리의 간극 자체를 자명하게 들여다 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나는 미궁이냐 일상의 삶이냐 이렇게 두가지 이율배반의 선택지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1) lullaby "르상티망을 품은 실현되지 않은 내러티브들을 달래는 것. 달래는 자"

나의 소우주는 굶주렸다. 원한과 자기혐오의 사슬에 묶여 있어 사방으로 불을 뿜어낼 뿐이다. 그래서 소우주를 잠들게 하기 위한 자장가가 지어졌으니.. 다음 다섯 가지가 그것이다.


음악, 독서, 네이버 글쓰기



2) what is my problem 재생목록 "미궁의 경계를 걷는 것. 자명한 자"

유튜브의 여러 아이디어를 탐험하면서 나의 문제(문제랄게 있다면)를 확인하고자 한다.

my dea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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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래의 노래(songs of songs) "내러티브들의 실현을 돕는 것. 역사가"

<나의 역사>는 나를 이해하는 최고의 도구지만 너무 복잡해서 문제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를 발견하여 추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율은 의미를 구현하는데 가장 좋은 도구다. 따라서 시와 노래의 형식을 빌려서 의미를 노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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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부르지 마라. 음악 듣지 마라. 모든 흐름에서 벗어나 오직 벌거벗은 상태로 현실을 마주하라."

"적막이 두려워 피하지 마라. 미래가 두려워 눈 감지 마라. 어둠을 두려워 말라. 그저 최대한 자명하게 심연을 훝어라. 자명한 이성이 나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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