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 종결 이후
나는 옛날부터 여러 종류의 수많은 씨앗을 뿌렸다. 정리되지 않은 씨앗의 모임은 이후 서로 얽히고 설켜서 잡초마냥 자라 의식이라는 토지를 점령하여 나의 자아를 가득 채웠고 통일된 형태가 아닌 재각각의 모양과 서사를 따라갔다. 이렇게 하나 안에 여럿이 있고 유한 안에 무한이 있으니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미궁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사생아들이 만연한 땅. 잡초가 무성한 땅.
<나의 역사>는 나의 머릿속 정리되지 않은 요소들을 정리하고 가시적이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상시적으로 느끼는 '해체되는 기분'과 원인 모를 상실의 느낌 등 근본적 불안과 부재의 심리를 파헤치기 위해 쓴 일종의 '분석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또 해석되어야 할 난해한 글이 되어버렸고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 목적은 상실한 또 다른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나는 단순한 정원을 원했지 거대한 녹초지를 원한게 아니었다.
또 아무리 작은 정원의 테두리를 만들었다해도 그 내용물이 난잡하면 그건 또 다른 미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내용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역사>에서는 나의 전반적인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발견하고자 했고 그 거대서사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대서사는 되려 나를 나 이상의 것으로 변질시켜서 되려 현재의 개인으로서의 나를 억압했다. 그 거대성으로 인해 또 다시 미궁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결론으로 나는 '<나의 역사> 에필로스'를 작성해서 세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1)lullaby 2)관조자 3)음유시인 그리고 나의 사유는 계속되어 다음과 같은 결론들로 이어졌다.
1) 에로스와 두 가지 광기 그리고 두 가지 반항(심야를 품은 정오)
세상에는 두 가지 광기가 있다. 외부에서 기원하는 자연적 광기, 인간 내면에서 기원하는 창조적 광기. 둘 다 'nature'로 통한다. 외부에서 기원하는 광기는 우리가 어떻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부조리의 형상 또는 러브크래프트적 초자연적 공포의 모습으로 찾아오는데 이들은 정복될 수 없기에 극복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커지는 만큼 나만의 지성으로 후퇴하여 반항해야 한다. 한편 내면의 광기는 다른 문제다. 그것은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나 자체인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은 '달래야 하는' 대상이다. 내면의 창조적 광기는 아이의 형상으로 다가오는데 그 아이는 하나의 신(神)으로서 창조하면서도 자연을 벗 삼는다. 나의 아이의 이름은 '에로스'다. 그것은 창조를 넘어 합일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외부의 광기는 '반항'(non)으로 내면의 광기는 '달램'(lullaby)으로 다룰 수 있다. 이렇게 광기는 질서 안으로 포섭되고 심야(헤르만 헤세)는 정오(알베르 카뮈) 안으로 포섭된다. 그렇게 정오는 심야를 품는다.
2) 충만(resonance)과 정신의 그릇 그리고 분열된 인간상 마지막으로 음유시인과 대서사시
정신의 에너지와 에로스라는 아이 그리고 잡초 또는 사생아들이 나의 의식 속에 이리저리 뒤썪이고 있다. 더 이상의 내폭과 혼란과 미궁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심야를 품은 정오'라는 나만의 철학을 만들어 나의 밀실에 잠시 질서를 박아 넣었지만, 결코 질서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나는 반항하기 위해 반항하지 않는다.
"왜 몇몇 사람들이 자살 대신 반항을 택하는가? ‘반항하기 위해서’는 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살기 위해서 산다와 같은 말이다. - 물론 모순적이지만 이런 태도 자체가 반항일 수 있다. 어떤 초월적인 의미나 외부적인 행복을 위해 산다기 보다 ‘자살하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 그 자체를 위해 산다는 것은 아주 모범적인 반항의 예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다른 얘기를 하고자 한다. - 다시, 왜 반항하는가? 카뮈는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 없이 반항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만 나는 부조리의 인간이 (지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미성숙과 감정과 낭만을 위해, 여름밤의 풀벌레 소리와 깨물면 눈물이 나게 단 여름 복숭아와 연인과의 뒤섞임을 위해, 천진난만한 아이의 꿈과 돈키호테의 몽상과 크눌프의 바람같은 삶을 위해 반항하는 것 같다. 정오, 자장가, 음유시인이 모두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성숙한 반항은 미성숙한 에로스를 위해 존재한다. 정오는 심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역으로, 심야의 영혼은 스스로의 고통스러운 모순을 해소해줄 정오의 태양빛을 갈망한다." - <나비> 김윤후
즉 질서를 세웠으면 여기서 끝난게 아니다. 반항은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시작이다. 무한을 향해 열린 다정한 오솔길이다.
다만 인간은 크로노스 신의 수하다. 즉 나는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유한 안에 갇혀 있기에 에로스 신처럼 무한을 향유할 수 없다. 그러나 대안이 있다. 크게 두 가지 대안이 있는데 하나는 1)충만(resonance)과 2)음유시인의 대서사이이다.
충만은 현재를 무한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 주어진 삶의 정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후회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는 영원이 되고 폐쇄적인 소우주가 된다. 음유시인의 대서사시는 현재의 폐쇄성에서 더 나아가 시간의 거대한 흐름에 봉착하여 나만의 서사시를 작성하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같은 작가 본인의 정신을 초월한 작품들은 나로 하여금 대서사시를 작성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대서사시는 크로노스 신에게 받치는 제물이다.
그럼에도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끝까지 대지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Extremist... An aesthetic voyagers" 그들은 현재에서 무한을 발견한 대지의 신들이다. 크로노스가 만든 시간이란 굴레 속에서 크로노스 본인조차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무한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카르페 디엠.
새로운 등불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