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Oct 22. 2021

빛과 그리고 그림자  1/2

   시간은 흐른다

 2018년 2월 16일, 금요일.

구정 설날 아침이다.

작년 추석부터 차례와 기제사를 성당 미사 봉헌으로 결정 내리고 일 년에 한 번, 봄철에 있는 어머님 기일에 맞춰 시골에 비어 있는 본가에서 2남 2녀, 네 남매 부부가 모두 모여 제사를 모시기로 했다. 명절을 맞이하는 수고가 한결 덜어졌다.  

 오늘은 남편이랑 아들과 같이 10시 성당 합동 미사 봉헌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큰애네 네 가족이 올 것이고 예비 며느리 ㅇㅇ가 예단을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다.


 여섯 살, 일곱 살이 된 두 손주가 에너지 넘치게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잘 노는 거실에는 온갖 장난감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려 있다.


 여섯 시에 일어나 어제 손질해서 양념에 재워 둔 갈비를 불에 올리고 밤새 바싹 마른 빨래들을 개켜서 각각 있어야 할 자리에 갖다 두었다. 식기 건조대에 가득 올려져 있는 그릇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두 대의 냉장고와 한 대의 김치냉장고를 살펴보며 여섯 명의 가족들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레지던트 4년차 격무에 시달리는 아들은 활기 넘치는 조카들을 피해 며칠 전부터 3월 말 결혼하면 살게 될 신혼집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도보로 채 5분이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다. 다른 가족들은 아직 모두 밤중이다.


 오늘 이어질 강행군의 일정을 생각하며 잠시라도 쉬어둬야겠다 싶어 잠깐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9시쯤 됐을 테니 이제는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 중인데 남편이 방문을 벌컥 다.


 "9시 30분이야, 9시 30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나왔다. 남편이 까칠하게 불만을 쏟아낸다.


 "나는 허둥대는 거 싫어."


 "허겁지겁 시간에 쫓겨 다니는 것 정말 싫어."


 "아침은 안 먹을 거야."


 각종 과일을 잘게 썰어서 유리그릇에 담은 위에 집에서 만든 요구르트를 넉넉하게 끼얹고 아로니아와 아몬드로 고명을 올린 것 한 그릇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빵이나 떡 한 조각, 약간의 콘프로스트와 우유 한 컵이 아침 식사다.


 부엌 벽에 걸려 있는 디지털시계를 보니 9:03이라는 숫자가 떠 있다.

 03이 왜 30으로 둔갑을 했는지.


 "9시 3분이잖아요."


 대답이 없다.

 준비해 두었던 아침 식사를 식탁에 차려 주었다.


 "시간에 쫓기면서 밥 먹는 것, 진짜 싫어."


 "안 먹을 거야."


 9시 40분에 출발하면 10시 성당 미사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아직 35분이나 남았는데 왜 아침 먹을 시간이 을까? 남편은 쌩한 분위기로 차려놓은 음식 앞에 앉았다. 요구르트 그릇만 비웠다.


 아내가 하루 종일 집안을 위해 얼마나 많은 가사노동을 하는지,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생각만 쏟아낸다. 내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아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내 몫이다. 전화를 하니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다.


 "네에, 바로 준비해서 갈게요."


 그런데 연락하는 일을 내게 미루던 남편이 바로 다시 전화를 한다.


 "ㅇㅇ야, 안 와도 돼. 편하게 쉬어."


 그리고 덧붙인다.


 "애를 왜 불편하게 하느냐, 편히 쉬게 놔두지 않고."


 나는 침묵을 지키지만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날 조상님과 하느님과 나를 생각하며 부모님과 함께 미사 전례에 참석하는 게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 마지막 명절이 아닌가.


 혼자 생각했다.


 '아들이 오든 안 오든 이제 그것은 아들이 결정할 문제다.'


 성당까지 20분 걸리는 길을 끝까지 말 한마디 없이 걸어갔다. 매번 뒷쪽 구석 의자에 앉길 원하는 남편을 뒤로 한 채 내가 좋아하는 앞쪽 중앙 부분 의자로 향했다. 미사 내내 너무나도 피곤했다. 평소에 누적된 피로에다 아침부터 신경전까지 벌였으니 무슨 기운이 남아 있겠는가. 성가 부를 힘도 없었다.


 미사 후 카톡방을 열어 보니 아들 문자가 들어와 있다.


 "전 위층에 있어요."


 1층 카페에서 보자고 연락했더니 아빠도 위층에서 만났다고 한다. 1층으로 내려가니 아들이 혼자 있다. 아빠는 다른 볼일이 있어 먼저 가신다고 했단다. 아들이랑 둘이 빠리 크로와상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하고 일어서니 파랗게 굳은 얼굴로 찬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남편이 들어선다. 혼자 산에나 가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자리를 옮겨 셋이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아들은 이런저런 할 말이 많다. 어릴 때부터 부엌에서 일하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묻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누나들이 붙여준 별명이 '알고지비'다. 무엇이든 다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천국의 왕자.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나서는 꼭 확인하는 말을 덧붙인다. 그것도 두 번씩.


"맞죠? 맞죠?"


 아마도 내가 일에 쫓겨 건성건성 응대하는 것이 성에 안 찼던 모양이다. 다른 엄마들은 아들이 집에서 말을 많이 한다는 걸 많이 부러워하곤 했다. 어릴 적 밝고 귀여웠던 모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읽고 있는 책에서부터 평창 동계 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팀 감동 스토리까지 소재가 다양하다. 요즘은 워렌 버핏 평전 읽는 재미가 쏠쏠한가 보다. 다양하고 깊이 있고 풍성한 화제가 재밌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는데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남편이 불쑥 한마디를 던진다.


 "00야, 너거 엄마는 너하고 이야기할 때만 말을 잘 한다."


 순간 머쓱하니 가라앉는 분위기.

 아들도 나도 입을 닫는다.


 식사를 끝내고 집에 오니 늦게 일어난 둘째가 집을 엄청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둘째네 시댁은 신정을 지내신다. 약병들과 온갖 물건으로 뒤덮여 있던 식탁도 말끔히 치워 놓고 발 디딜 틈 없던 거실도 훤하게 정리해 놓았다.


 시댁에서 오전 시간을 보낸 큰딸네가 오고 이어서 아들 예비부부가 사돈댁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예단 보따리들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12명의 3대 가족들이 다 모여 호호 하하 웃으며 세배를 하고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었다. 외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이미 신혼집 단장을 끝낸 아들집으로 향했다. 손주들은 예쁜 예비 외숙모 곁을 떠나지 않고 앞다투어 팔짱들을 낀다. 사돈댁에서 준비해 주신 케이크를 자르고 커피를 마셨다. 네 명의 손주들은 신혼집 넓은 소파 위에서 이리저리 뛰고 구른다. 이 방 저 방 몰려다니며 외삼촌 집 좋다고 야단이다.


 집주인인 아들네는 둘이 한 조가 되어 열심히 예쁜 새 그릇들을 꺼내 놓고 과일들을 준비하며 손님 접대 폼을 잡는다. 왁자지껄 재밌는 대화들이 오가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었다. 둘째가 깨끗이 설거지를 마무리해 주고 집주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 같이 걸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구정 설날 하루가 지나갔다.


 2018년 2월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할까?> 크리스텔 프티콜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