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용 책상이 세 개다. 거실 한 귀퉁이, 햇빛 환히 스며드는 남쪽 베란다 창문가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탁자까지 내 마음대로 쓰니 내 책상은 네 개가 된다. 정남향 거실 깊숙이 파고드는 쨍쨍한 볕을 피해 서늘한 부엌에 놓여 있는 식탁까지 종종 내 책상으로 변신하니 그럼 내 책상이 다섯 개가 되는 셈인가?
결혼 후 내 책상을 처음으로 마련한 것은 결혼 생활 15여 년이 지난 1990년대 초반부의 일이다. 까칠하게 거부하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공을 들이고 다른 교우 부부들의 고마운 지원과 도움을 받아 내가 원하고 희망했던 2박 3일 ME 주말 피정을 다녀올 수 있었다.
피정 기간 내내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둘이서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고 이견을 좁혀가는 조율의 시간은 만만치 않았다.
금요일 저녁 첫 소개 시간, 직장이 바로 근처에 있었던 남편은 지각을 했다. 남편대로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쉽게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수단도 없었던 시절이라 마음 졸이며 안타깝게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음이 꽤나 상했다.
이렇게 참석하기까지 나름 긴장해서 일을 꾸며 왔는데 정작 시작 시간에 또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일엔 칼같이 정확한 사람이 ᆢ.
참석자 부부 전원이 둘씩 일어나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배우자의 이름과 장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호명된 부부들은 꿀이 흐르는 다정한 분위기로 서로를 추켜 세웠다.
늦게 도착한 남편과 맨 마지막으로 일어선 우리 둘. 뾰로통해진 내가 먼저 말할 만한 배우자의 장점이 없다고 발표했다. 거꾸로 된 부창부수 婦唱夫隨, 남편도 질세라 내 아내의 장점은 없다고 공표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그리고 또 앞으로도 이 피정을 거쳐 간 수많은 부부들 중 그렇게 말한 유일한 커플일 것이다.
각 부부에게 배당된 작은 방에서 서로 부부로서의 상대에게 고마운 점과 힘든 점들을 노트에 기록하여 말하고 들어주는 나눔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는 둘 다 노트 한 권으로는 부족하여 더 받아와서 적어 내려갔다.
찬스, 나는 이런저런 일들로 이러저러하게 힘들었다는 내용을 구구절절 적어 내렸다. 남편은 거세게 반박했다. 분노했다. 자기처럼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그런 불평불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용납할 수 없다. 부부 중심이라니,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다. 내가 굳게 지켜오고 있는 충효의 성실한 삶을 잘못되었다고 바꾸라니 억울하다. 나는 배운 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부모에게 효도, 사회에 공헌, 나라에 충성.
하긴 신혼시절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어쩌고저쩌고 내가 적어 건넨 꽃무늬 편지지를 펴 보지도 않고 와그작 구겨서 있는 힘껏 부엌 바닥에 내팽개친 신랑님이시다.
남편은 나와 단둘이 의견을 나눌 때는 티격태격 못마땅해하며 새파랗게 화를 내었지만 공식적인 전체 발표 자리에서는 프로그램 자체가 의미 있고 감동적이며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ME 피정의 모든 것이 정말 좋았다. 사랑은 의지이며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이웃과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는 가정이다. 가슴이 설렘과 뿌듯함으로 꽉 차 왔다. 다음 차수에 참여할 장애부부들의 참가비 마련을 위한 기부금 모금에도 기쁘게 액수를 적어 넣었다.
우리 차수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었던 Impossible dream과 Unreachable star는 지금 떠올려도 행복하다. 내가 갈망한, 그러나 결코 획득하지 못한 나의 Impossible dream이 아직도 그 노래 속에 숨어 빛나고 있다.
피정이 끝나고 후속 프로그램 숙제가 주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예닐곱 팀의 부부가 만나 그간 일상에서의 부부 문제들을 나누는 Bridge 모임 참여와 매일 10분씩 시간을 내어 부부가 서로의 생각을 노트에 적어 나누는 Ten & Ten 실천이다. '하고지비' 인 나는 그 둘을 다 잘해 내고 싶었다. 브리지 모임에 꼭 참석할 것이고 텐앤텐도 꼭 해 볼 것이다.
먼저 책상부터 마련해야 했다. 남편이 출근한 후 가구점으로 향했다. 양 옆에 책꽂이가 있고 거기에 책상 상판 두 개를 걸치고 중간에 3단 서랍으로 그 둘을 떠받치는 넓고 노란 원목 책상에 눈길이 꽂혔다. 단독주택의 방 세 칸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지만 다행히 베란다를 터서 확장한 안방이 꽤 넓었다. 동쪽 창문가에 책상을 둘 만한 자리가 있었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 배달시킨 넓은 책상 두 개를 안방 벽 한쪽에 멋지게 갖춰 놓았다. 똑같은 의자 두 개도 물론이다.
40대 초반이었던 젊은 남편은 아내의 넘치는 의욕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00일 동안 그 작업을 계속했다. Ten &Ten. 그래도 우리 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나 변화는 없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각자의 방법으로 이 작업을 행했을 뿐 끝내 자기만의 가치관과 성향에 푹 빠져 있었던 듯하다. 영원한 평행선이다. 씁쓸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동참해 준 것만도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브리지 모임도 매번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남편과 가기 전에 그리고 다녀와서 항상 부딪쳤지만 모임 그 자체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우리 집에서 주최했을 때도 기뻤다. 사는 맛이 났다.
이사로 집을 옮겨 다니면서 남편용 책상 하나는 사라지고 내 책상 하나는 항상 안방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동안 4명 팀으로 이루어지는 논술 수업 탁자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계속 상급 학교로 진학하고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아들은 내게 컴퓨터 익히기를 강력히 권유해 왔다.
결혼으로 집을 떠나기 직전에는 자세한 설명서를 첨부해서 한글 자판 익히기 프로그램을 저장해 주었다. 하지만 둘째네 네 식구와의 합가에 겹쳐 도전과 변화에 용감하지 못한 나는 계속 컴퓨터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세 아이의 결혼과 독립, 남편의 퇴직과 고향 함안에서의 농촌 살이 2년의 세월을 보낸 후 2020년 11월, 다시 서울로 귀환한 내 집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앞일을 예측할 순 없지만 이 집에서 남편과 둘이 노후를 보내게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모든 가전제품들이 다시 세팅되었다.
어느 날 조립식 책상 하나가 주문 배달되었다. 집에 들른 아들은 비어 있는 작은 방 한쪽 벽에 희고 반듯한 그 책상을 조립하여 배치하고 그 위에 컴퓨터 한 대를 세팅해 주었다. 한글 자판 연습용 프로그램을 다시 마련해준 것이다.
두 번째 책상이다.
석 달 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편의 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1년 전의 일이다.
두 달 전, 일과성 기억상실증을 겪은 후 잠시 둘째네 집에 머무르고 있는 나에게 아이들은 계속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물어왔다.
책상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우리 집 작은방에 놓여 있는 것과 똑같은 책상이 바로 택배 주문되어 왔다.
둘째가 뚝딱뚝딱 조립해 주었다. 집에 여러 개 있는 접이식 의자까지 하나 배달해 왔다.
나만의 공간에서 책상까지 갖추고 마음껏 읽고 쉬며 평안하게 지냈다.
잘 정리되어 있는 870리터 냉장고. 평소에도 냉장고 문을 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투명한 글라스락 용기에 담겨 있는 깎아 놓은 과일조차도 제대로 찾아 먹을 수 없다며 맨붕이 되는 남편. 더구나 이제는 암환자가 되었으니 ᆢ.
정신적인 불안과 육체적인 고통을 세밀하게 반복 표현하며 매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남편. 세 끼 식사와 두 번의 간식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 노동에 집중했다. 보호자가 되어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며 집안을 가득 채운 환자의 우울한 고통 호소와 부당한 통제에 얽매였다. 버거운 날들이었다.
일흔이라는 믿을 수 없는 나이를 코 앞에 둔 시점에서.
한 달 남짓 그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온했다.
마치 결혼 전 학창 시절로 돌아온 듯했다.
아, 편하다.
아, 좋다.
내 몸과 마음이 합창을 해댔다.
하지만 마냥 편안할 수만은 없었다.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긴 했지만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게 된 남편을 혼자 있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다시 와서 쉬시라는 나를 위한 그 공간에는 지금도 하얀 조립식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다.
고마운 나의 세 번째 책상.
2022년 3월 2일
우크라이나 사태의 빠른 종식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신자 모두의 단식과 기도를 간절히 청하신 재의 수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