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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Feb 07. 2023

여기 이 자리에 우리가.

  미수 米壽

 정월 대보름 아침, 싸늘한 바깥 기온과는 달리 자주색 오곡밥이 익어가며 뽀얀 김을 뿜어내는 부엌에는 온기가 가득 찼다. 까맣고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에서 퍼져 나오는 뜨끈뜨끈한 열기가 부엌 공간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시는 어머니의 익숙한 몸놀림에 따라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스러진 뜨거운 재 위에서는 말린 조기 몇 마리가 양쪽 날개 달린 석쇠 중간에 끼워져 앞뒤로 노르스름하게 익어갔다. 고소한 생선 냄새가 마당으로 번져 나갔다.

 다음 차례는 묶은 짚끈을 풀어내고 얌전히 차곡차곡 쌓아 놓은 까만 김 뭉치. 재빠르게 불기운 위를 넘나드는 어머니의 분주한 손길을 따라 남아 있는 불씨 위에서 휙휙 앞뒤로 뒤집어지자 구불구불 부풀어 오르며 초록으로 변해갔다. 옆에 놓여 있는 대소쿠리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금세 한 소쿠리 가득 향긋한 김이 수북이 담긴다. 윤기 흐르는 찰진 오곡밥과 함께 조기와 김, 이 두 가지가 내 마음속에는 정월 대보름의 대표 음식으로 새겨져 있다.

 

 마루로 뚫려 있는 조그만 여닫이 문을 통해 조기와 김이 안방으로 전해지면 엄마의 재빠른 손길을 지켜보며 불 앞을 떠나지 않던 나도 방으로 들어갔다. 항상 일고여덟 명은 넘었던 식구들의 입 속으로 금방금방 사라지는 음식들. 바쁘게 움직이는 수저들. 엄마가 대강대강 사등분해 찢어 주었던 구운 김에 올려 숟가락으로 살짝 떠올린 왜간장 한 방울 적셔 먹던 따끈한 찰오곡밥의 진미. 소쿠리는 금세 텅 비어갔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수북이 쌓여 올라갔던 대나무 소쿠리 속의 김더미는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던 어린 시절의 고요했던 침묵을 꽤나 따뜻하게 데워준다.


 커다란 무쇠솥에서 빠져나와 붉은색 모란이나 금붕어들이 그려져 있던 노란 알루미늄 찬합으로 옮겨져 하루 이틀 더 먹을 수 있었던 오곡찰밥. 식어가면서 더 찰지고 구수던 것으로 기억되는 건 나의 미화 포장된 유년 추억 한 장면일까?

 밖으로 나돌기에 분주했던 다른 형제들과 결이 많이 달랐던 나의 조용한 유년 시절 한 자락. 멀리 바라다 보이던 앞산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 불꽃처럼 그 아침이  조그맣 빛나고 있다.


 정월 대보름 바로 다음날은 큰오빠의 생일이었다. 무한 긍정 대표주자였던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 정기가 센 날을 하루 비켜간 다음날이 생일로서는 아주 좋은 날이라고 하셨다. 똑 같은 논리로 단오 바로 다음날 태어난 우리 아들도 좋은 날에 태어난 외손주였다.

 칠 남매의 맏이, 다섯 번째 서열인 나보다 열아홉 살이 많으신 큰오빠. 엄마가 많이 많이 의지하고 많이 많이 사랑했던 첫아들, 장남.

 큰오빠의 88세 생신인 어제, 2023년 2월 6일, 음력 1월 16일, 큰오빠를 찾아뵈었다. 80 평생을 고향인 부산에서 살다 장남이 사는 구리시로 이사 온 지 4년째다. 지난 1월 7일은 엄마, 아버지 결혼 61주년 기념 축하일이라고 조카가 사진을 보내왔다. 조카와 조카며느리, 다 자란 손주들, 창창한 젊은이들이 큰오빠와 올케언니 바로 옆에 포진하고 있으니 든든하다. 걱정이 없다.


 조카며느리가 소형 승용차의 뒷좌석에 시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전철역 입구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미리 정해두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불암산 자락 아래 야산 하나를 완전히 다 개발하여 유원지로 만들어 놓았다. 조그만 연못, 흉내만 낸 눈썰매장, 얼음이 덮고 있는 얕은 계곡, 베이커리 카페, 한정식 식당, 족욕 체험장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거의 모든 나무들을 휘휘 감고 지면에도 깔려 있는 잔잔한 조명 알전구들은 대낮인데도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 태양이 서산 너머로 숨어들면 기를 펴고 펼쳐질 현란한 빛의 잔치가 바야흐로 대기 중이었다. 엄청난 규모였다. 앞으로는 멀리 구리시의 높은 아파트 단지들이 눈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툭 틘 전망이 펼쳐졌다.


 식사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옛날이야기들이 오래된 보따리를 풀고 나왔다.

 88세 米壽. 쌀米자가 八十八로 이루어져 있길래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걸음걸이는 조금 불안정하지만 아직 청력도 시력도 입맛도 건강하신 편이라 소통에 지장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서로 마음 편하게 웃어가며 옛날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올케언니의 남편 지청구, 대화의 양념도 빠지지 않았지만 위험수위에는 한참 미달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카며느리가 한마디 보탰다.

 "우리들하고 있을 때는 아버님이 옛날이야기를 전혀 안 하시는데 오늘 처음으로 옛날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집오신 큰올케언니. 6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 7남매 중 오빠보다 한참 어린 우리 4남매에게 큰오빠는 아버지셨다. 올해 예순다섯이 된 막내와는 무려 스물세 살이나 차이가 난다. 활달하신 어머니와 장녀인 큰언니의 힘이 보태졌지만 큰오빠의 헌신이 가장 핵심을 이루는 중심축이었을 것이다.


 큰오빠 신혼 방 한쪽 벽에 놓여 있었던 커다란 호마이크 책장. 그 책장 오른쪽 귀퉁이에 붙어 있었던 작은 여닫이문 안쪽에는 언제나 작은오빠와 나의 고등학교, 중학교 납부금 고지서가 딱 붙어 있었다.

 학기 초에 받아온 누런 갱지 고지서. 4사분기의 납부 마감 기일과 납부 금액이 적혀있는 고지서는 바로 큰오빠 손으로 전해져 그 자리에 풀로 딱 붙여졌다. 그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거기 적힌 숫자들은 오빠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70을 코앞에 둔 내가 90을 바라보는 큰오빠와 올케언니, 두 분에게 수고 많으셨다는,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드릴 수 있고 생신 축하 식사를 대접해 드릴 수 있고 은 용돈 봉투를 건네드릴 수 있는 이날은 참으로 고마운 간이다.


 우리가 앞으로 과연 몇 번이나 더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 떠오른, 지워 버릴 수 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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