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Apr 16. 2023

내 방을 돌려주세요

  3代의 소통

 초등 4, 5학년 두 외손주가 있는 둘째네 집은 아이들의 책이 넘쳐난다. 새로 산 것, 빌려 온 것, 중고로 구입한 것, 친지 지인들에게서 물려받은 것 등등 다양하다. 저마다 색다른 제목들만 훑어보아도 풍요로운 동화책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동화 세계의 깊이와 폭이 상상을 넘어선다. 판타지, 성장, 명랑, 순정, 철학, 과학, 역사, 공포ᆢ.

 동화 작가들이 응모한 창작 동화들을 선별된 초등학생 백 명이 미리 읽어 보고 선정하여 정기적으로 출간하는 시리즈 출판물들도 있다. 당연히 재밌다.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동화 출판 세계의 치열한 경쟁과 상술이 놀라웠다.


 조악한 갱지에 커다란 활자로 인쇄된 위인전 두 권, 표지가 뜯겨 나간 소공녀 소공자 동화책 두 권, 이렇게 네 권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우리 집 동화책이다.

 학교도 불모지이긴 마찬가지였다. 전교생이 몇 천을 헤아리는 도시의 큰 학교였지만 도서관이라는 곳은 아예 없었다. 5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교실 뒤에 학급문고란 명목으로 열댓 권의 그림 동화책이 비치되었다. 새 학기가 되면 나보다 네 살 많은 작은오빠가 받아오는 국어, 도덕 교과서가 기다려지는 읽을거리였다. 아득한 유년의 낡은 기억들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머릿속을 스쳐간다.

 참 좋아진 세상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공공연히 떠도니 아이들의 앞날이 막연히 걱정되기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세계가 또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잘 걸어갈 것이다. 우리가 신혼시절의 지하 두 칸짜리 방에서 외벌이 월급쟁이 수입으로 갓난쟁이 첫애를 키우며 상경한 시동생의 재수학원 뒷바라지를 다 해내고 이후 계속된 지방 사립대학 등록금을 모두 감당해 왔으며 돌아가시는 날까지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 드렸던 것처럼.


 과거 우리들의 삶과 현재 아이들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컴퓨터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손주들과 뭐라도 소통할 수 있는 대화거리를 찾아볼까 하고 종종 책을 들먹여 본다.

 "요즘 제일 재밌었던 책이 뭐야? 할머니도 함 읽어 보게."

 4학년 손자 녀석은 딱히 그럴 만한 게 없다고 한마디로 퉁쳐 버린다. 눈길도 돌리지 않고 게임의 세계에 계속 집중한다. 한 살 손위인 누나는 잠깐 망설이다 얼른 책 한 권을 골라 주고 다시 급히 컴퓨터로 돌아간다. 요즘 한창 애니메이션 블로그 제작에 빠져 있다.


 오늘 건네받은 책은 제목부터 마음을 끈다.

  <내 방을 돌려주세요.>

 리비 글리슨 글, 앤 제임스 그림, 김혜원 옮김, 오스트레일리아 어린이 책 위원회 어린이 책 상 수상 작품.


 130페이지의 장편 동화 속에 군더더기 문장이 하나도 없다. 내 생각에는.

 슬쩍 끼워 넣은 듯한 짧은 문장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이 미루어 짐작될  잠깐 머물러 그 장면을 구체화시켜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빠, 엄마, 쌍둥이 언니 둘, 초등 2학년인 주인공 한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여주어야 하는 갓난쟁이 동생. 여섯 명의 가족이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에서 산다. 쌍둥이 언니 둘과 한 방을 쓰는 한나는 매번 언니들의 심술에 시달린다. 언니들은 방을 삼등분하여 금을 그어 놓고 일 센티라도 침범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데 언니들의 영역을 지나지 않고서는 방을 나갈 수가 없다. 화장실을 드나들기도 힘들다. 엄마 아빠랑 한 방을 쓰는 젖먹이 동생도 점점 자라고 있다.


 엄마 아빠는 오래된 뒷 벽을 잘라내고 새로운 방 한 칸을 만들었다. 한나와 아가 동생이 쓰게 될 방이다. 한나는 꿈에 부풀었다. 갓난쟁이 동생을 돌보는 것쯤 일도 아니다.


 오늘, 엄마 아빠는 마무리 작업으로 페인트칠을 했다. 천장은 노란색, 벽은 파란색. 한나의 선택이 존중된 첫 결정이다. 페인트 냄새가 빠지는 내일, 한나는 이 방의 주인이 된다. 드디어 내 방이 생긴다. 새 방으로 옮겨질 책과 장난감들은 이미 상자 속에 다 포장되어 있다.


 페인트 칠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마친 엄마 아빠는 병원으로 할아버지 병문안을 갔다. 한나는 다시 새 방으로 들어가 창틀과 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 아빠가 식탁으로 모두를 부른다.

 "많이 편찮으시고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고 계속 병원에 머물 수도 없는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와야 한다."

 한나는 화들짝 놀란다.

 "설마ᆢ, 내 방은 아니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구나."

 다음날 그 방은 쇠약해진 할아버지의 거처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왜? 왜 할아버지가?'

 

 한나는 다시 그 방을 찾기 위해, 할아버지가 당신 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시도한다. 할아버지 슬리퍼에 미끈미끈한 달팽이 집어넣기, 침대 밑에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물건들로 가득 찬 가방 지퍼 열어 숨겨두기. 심지어 지역 신문에 할아버지를 돌볼 배우자를 구하는 구인 광고까지 싣는다.

 나이 든 신사.

 정원 가꾸기와 음악 감상을 좋아함.

 유사한 취미를 가진 여자를 구함.

 주소, 전화번호.


 하지만 이 모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엄마 아빠에게 심한 꾸중까지 들었다. 문 닫힌 안방 앞을 지나가다 엄마 아빠의 숨죽인 웃음소리를 들은 한나는 그 웃음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잠든 그날 밤, 목이 마른 한나는 살금살금 부엌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손녀와 할아버지.  


 "넌 이 할아비가 여기에 있는 게 싫지? 그렇지?"

 "네."

 "이 할아비도 여기 있는 게 싫단다. 할아버지를 떠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 기쁘구나."

 "기쁘시다고요?"

 "이 집에서 나를 어린아이처럼, 환자처럼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모두들 너무 친절했어."

 "그 방은 내 방이 아니야."

 "아플 때는 침대에서 많은 시간을 생각하면서 보낸단다. 그럴 때는 평소에 지냈던 곳에 있는 게 가장 좋아. 자신에게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곳에. 그 방에서는 네 할머니와 함께 있는 걸 느낄 수 있지만 여기서는 ᆢ."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 할아비도 모르겠구나. 용감해지라고, 그저 이렇게 생각한단다."


 이튿날, 가족회의가 열렸다. 아빠가 말했다.

 "아무래도 너희들은 늙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돌보실 수가 없으며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사랑과 관심을 줄 수 있는 가족이야. 할아버지께 친절하게 잘해드려라."

 한나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정말로 정말로 슬퍼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날 밤, 엄마가 한나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와 오랫동안 얘기했단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계시고 싶어 하지 않으며 엄마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힘들어하시는지 전혀 몰랐단다."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가 떠났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복지회의 노인 방문 급식 서비스, 매일 들러 살펴볼 지역 간호사를 알아볼 것이다. 할아버지는 쓰러질 경우 단추를 누르면 담당 의사가 달려오는 새 팔찌를 찼다.

 차창 너머로 할아버지가 작별 인사를 했다.

 "이 할아비한테 잘해 줘서 고맙다. 네가 보고 싶을 게야."


 할아버지가 정말로 가셨는지 궁금해하는 단짝 친구들에게 한나는 말한다.

 "나 때문에 가신 게 아니야. 할아버지가 원해서 떠나신 거지."


 한나가 온종일 도우미 언니와 함께 방을 꾸미는 일을 마쳤을 때 엄마는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선물을 전해 주었다.

 하버 브리지가 있는 스노우 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매주 일요일마다 하버 브리지로 산책을 나갔던 특별한 외출. 그곳 고물상에서 할머니가 구입했다는 스노우 볼. 할아버지는 그걸 집어들 때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생각한다고 했다.


 한나와 아가 동생은 새 방에 들었다. 방바닥의 깔개 위에 누웠다. 엄마가 친정을 떠나올 때 외할머니가 주셨던, 넝마로 만든 부드러운 깔개다. 둘은 깔깔거리며 눈송이들이 소용돌이치는 스노우 볼을 흔들고 또 흔든다.


 어린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읽어야 할 동화책이다. 어린이들이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수명 연장, 기계화, 홀로'라는 특성으로 요약되는 현대사회. 급속도로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가족 간의 갈등을 줄이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강요되어 온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가 아니었다. 인생을 오래 살아온 기성세대의 다음 세대에 대한 이해심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지혜였다. 자신과 상대를 모두 아끼는 진정한 사랑이었다.

 선진국 수준의 노인복지정책도 뒷받침되어야 하고 ᆢ.












































 





























 







작가의 이전글 버거운 감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