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졸였던 9일 동안의 치료과정을 글로써 남겨 본다.
8월 28일 오전 11시~29일 오전 2시, 수술실
29일 오전 2시~30일 오후 2시 30분, 중환자실
30일 오후 2시 30분~9월 1일 오후 8시, 일반병실, 간병인, 동생의 아들 조카 M
9월 1일 오후 8시~9월 2일 오전 10시, 간병인, 나
9월 2일 오전 10시~9월 3일 오후 11시 30분, 고용 간병인 A
9월 3일 오후 11시 30분~9월 4일 오전 6시, 나
9월 4일 오전 8시 30분~오후 8시 40분, 작은언니의 딸 조카 E
9월 4일 오후 8시 40분~9월 5일 오전 10시, 조카 M
9월 5일 오전 10시~현재, 간병인 B
15시간 진행된 수술도 수술이었지만 그 뒤의 치유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코로 연결된 관으로 식사와 투약을 하고 목과 양쪽 두 허벅지에는 기다란 수술자국과 살을 떼어낸 큰 상처가 생겼으며 호흡을 위해서는 목을 뚫고 관을 꽂아 놓았다.
거칠게 호흡을 이어가며 짧게는 2,30분, 길게는 1시간마다 목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가래를 뽑아내는, 이른바 석션이라는 치료를 해야 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여린 점막을 건드리며 가래를 뽑아내는 동안 환자는 고통으로 상체를 들썩거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마치 전기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잠시라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끊임없이 뒤척이며 고통스러워했다. 다행히 의지가 강하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열심히 그 과정을 잘 견디고 조금이라도 자기 힘으로 해내려고 하는 씩씩한 모습이 돌보는 이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으니 간병인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해야 한다.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긴 첫 이틀간 동생의 아들, 조카 M이 씩씩하게 간병을 했고 월요일 근무를 위해 지방으로 가야 하는 일요일 저녁 8시부터 전문 간병인이 오는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내가 밤 시간을 맡았다. 서른 살 청년 조카 M은 석션을 시연해 보였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매번 청할 때마다 간호사 분들은 성의껏 친절하게 응해 주셨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날이 밝아 약속한 간병인이 왔다. 캐리어 위에 보따리를 하나 더 얹어서 짐을 끌고 병실을 들어서는데 짙은 화장에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깔끔한 차림이었다. 눈썰미 없는 나로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60대? 70대? 굽 높은 샌들에다 프릴로 마감된 원피스 차림으로 들어서자마자 당신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8년 이상 이 일을 해 온 전문 간병인이고 석션도 잘한다고 했다.
마침 그때 동생은 나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몸에는 주렁주렁 작은 주머니들을 단 채. 나는 그 새 빨리 땀에 젖은 시트를 바꿔 놓았다. 욕창 방지 매트가 깔려 있어 고무줄로 처리된 시트를 덮어 씌우면 되었다. 이제 환자를 빨리 침대로 도로 데려와 편히 눕혀야 한다.
방금 들어선 간병인은 시트에 손을 댔다. 이런 일은 자기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며 바꿔 놓은 시트를 벗기고 자신이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귀퉁이를 꼭꼭 눌러가며 다지고 각에 맞게 정확하게 다독이며 구석구석 거듭해서 매만졌다. 이건 이래야 되고 저건 저래야 된다고 입으로 계속 추임새를 넣으며 끝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변기 위에서 기다리는 환자는 힘들기만 한데 간병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트 정리에만 진심이었다. 슬쩍슬쩍 건네는 재촉당부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당신의 마음에 들게 완성된 듯 뿌듯이 바라보며 혼자서 또 자화자찬을 이어갔다.
동생과 나는 서로 있는 힘을 다해 부축하고 버티며 침대로 돌아왔다. 간병인이 푸념을 쏟아내었다.
"오자마자 옷도 못 갈아입고 이 고생이다."
간호사가 떨어뜨려 놓은 의료용품 포장지에도 입을 댔다.
"아이고, 저 가스나들."
그 사이 쓰레기통을 비우러 온 병원 청소부에게는 또 사람 좋은 친밀감을 표현하며 상대에게서 환한 웃음을 끌어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간병인이 너무 말이 많으면 환자가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요."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을 했다.
"나는 경상도 여잡니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경상도 여자와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한마디로 눙치고 넘어갔다.
"저도 경상도 여자입니다. 부산 여자."
나와는 너무 결이 맞지 않았지만 업체를 통해 일일 급여 15만 원의 간병인으로 고용했으니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그녀 눈에는 이미 내가 완전 을(乙)로 보였다.
환자 1인당 보호자 1명밖에 머물 수 없다는 간호사의 지적을 받고 찜찜했지만 동생과는 잘 맞길 바라며 병실 문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동생의 문자가 왔다. 허벅지 양쪽 드레싱을 끝내고 붕대에서 밴드로 바꾸었으니 불편한 기저귀보다 사각팬티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아침 설거지를 하며 친구들과의 오늘 점심 약속 시간을 떠올렸다. 몇 시에 팬티를 사러 갈까? 순간 안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엄마'라면 만사를 제치고 바로 시장으로 달려가셨을 것이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햇볕은 쨍쨍, 옷은 금세 땀으로 젖었다. 땡볕을 뚫고 도착한 쇼핑센터는 개점 시간 전이라 굵은 체인으로 칭칭 감긴 유리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릴없이 한참을 기다리다 여섯 장을 구입했다. 병원에 들러 먼저 한 장을 전달했다. 나머지 다섯 장은 깨끗이 세탁을 해야 된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후다닥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아홉 명 동창이 모이는 점심 약속 장소로 달렸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다행히 10분밖에 늦지 않았다. 식사와 다과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세탁기를 돌렸다. 바람 잘 통하고 햇볕 좋은 곳에 가장 빨리 말릴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다.
저녁 8시, 보송보송 말린 새 팬티 다섯 장을 아담한 파우치에 담아 병원 1층 로비에서 간병인에게 전달했다.
한가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것저것 둘러보는 시간, 소리를 죽여 놓은 핸드폰에 카톡이 떴다. 밤 11시 11분. 동생이었다.
ㅡ간병인이 사람 죽이려 한다.
겨우 써 놓은 한 줄 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ㅡ지금 바로 갈게.
문자를 넣고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마음이 후덜거렸다.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조심스러웠지만 처음으로 길 건너 가까이 사는 아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은 바로 병원으로 오겠다고 했다. 11시 30분, 같은 시간에 병원 1층 로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아주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환자가 당신을 오해해서 너무 화를 내기에 당신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밖에 나와 있다고 했다. 수고 많으셨고 지금부터 제가 대신하겠다고 하니 밤이라 당신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 곤란하다고 했다. 말도 못 하고 힘들게 투병하고 있는 중환자가 보낸 격한 문자 내용을 생각하면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틀 치 수고료를 드리고 내가 하겠다고 하니 짐을 꾸려서 내려오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마음은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찼다. 기다리다 못해 어렵게 경비 요원의 양해를 얻어 아들과 함께 병실로 올라갔다. 8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 둘과 마주친 아주머니는 동생을 탓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오해를 하고 화를 내고 성격이 아주 쇠꼬챙이 같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죄송하다, 수고하셨다, 힘드셨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양해를 구했다. 아주머니는 당신 집에 가는 택시비를 요구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하루 반을 일하셨는데 이틀 분 30만 원을 드린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떠나고 아들도 보내고 나는 병실로 들어갔다.
동생은 완전 상기되어 있었다. 휴게실로 나와 A4 용지 세 페이지 가득 힘들었던 많은 사연들을 쏟아내었다. 얼마나 아픈지 아무도 모른다. 석션한답시고 마구 깊이 쑤셔 대고 숨구멍을 막아 죽을 뻔했다. 간호사들한테는 거짓말만 한다. ᆢ
처음 본 순간 나는 10분만 함께 있어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에 동생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고 상상되었다. 한참을 걸려 필담을 마친 동생은 침대로 돌아와 점점 평안해지고 나는 더 긴장하여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긴장으로 완전히 날밤을 새었다. 소중한 치유가 이루어지고 있는 귀한 시간들.
아, 집이 바로 병원 코앞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 밤 내가 이렇게 동생의 병상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된 것에 너무나 감사했다. 도움 없이는 몸도 못 움직이고 말도 할 수 없는 동생이 간절한 카톡을 넣은 그 시간, 밤 11시 11분,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바로 읽을 수 있었는지.
거듭 부탁드리는 석션 치료를 바로바로 들어주시는 간호사님들도 고맙고 조용히 물러가 준 간병인 A씨조차 고마웠다. 마음 놓고 편히 눈 감고 누워 있는 침대 위의 동생도 애틋하고 고마웠다.
다음날 아침, 내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와 준 언니의 딸, 50대 조카 E는 성실하고 야무지게 석션과 모든 돌봄에 12시간 동안이나 최선을 다해 잘 해 주었다. 간호사들에게 웃음 지어 보이는 환자 동생을 보고 조카 E의 섬세하고 유능한 간병 솜씨를 칭찬해 주었다고 했다. 밤에는 조카 M이 휴가를 내어 승용차로 두 시간 거리를 바로 달려왔다. M이 급히 새로 구해 오늘 아침부터 근무를 시작한 간병인 B 씨는 잘해 준다고 동생이 알려 왔다.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갖춘 남자분이라고 했다. 곧 간병인 없이 혼자 지낼 수 있게 될 거라는 문자도 보내왔다.
떠나간 이튿날, 간병인 A 씨는 당신의 진주 반지를 이불 위에 두고 왔으니 찾아봐 달라는 전화를 해 왔다. 그 시간 간병 중이었던 조카 E가 침대 밑에서 찾아내어 서랍에 보관해 두었다고 전화를 해 주었다. A 씨는 고용인인 조카 M이 부르는 호칭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고모님"
아무 일 없었던 듯 상냥하게 응답하는 밝은 목소리가 나에게는 많이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