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도보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남쪽으로 백여 미터 걷다가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든다. 주택가 골목 끝에 있는 나무 계단 스무여 개를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이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저절로 가슴을 넓게 펴고 숨을 크게 쉬게 된다. 눈으로는 자연만이 표출해낼 수 있는 다양한 색깔들의 오묘함을 느끼고 발바닥으로는 푹신한 풀밭의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며 느긋하게 몇 발짝 발걸음을 옮긴다. 곧이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편안하게 누워 있는 능들을 만난다. 말이산 고분 제1호분부터 시작하여 제37호분까지 단정하게 발굴 정리되어 있고 다른 많은 고분들은 지금도 계속 발굴, 탐색 중이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끝이 붉게 물든 노란색 키 큰 잔디와 그 사이사이 피어 있는 보라색 들국화가 들판을 온통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다. 오래 된 나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매력적인 정취를 보여준다.
순간 갑자기 공간 이동을 한 듯하다. 조금 전까지 두 발 딛고 서서 먹고 마시고 숨 쉬던 쳇바퀴 같은 현실의 삶을 벗어나 죽은 이들이 편안히 누워 숨 쉬고 있는 과거의 느린 시간으로 옮겨 와 있는 느낌이다. 발아래 펼쳐져 있는 아파트들과 시가 풍경들, 그 너머 저 멀리서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는 높낮은 산들은 어느덧 한 폭의 병풍으로 변해 버린다. 넓고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고분들이 이 공간의 주인이다. 경남 함안군 가야읍 말이산 고분군.
숨이 탁 트이는 상쾌함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고요함이 온몸을 감싸 온다. 잘 정리되어 있는 오솔길. 아스름히 내리쬐는 늦가을 햇살. 지난 한 철 무더운 여름밤에는 까만 어둠 속에서 신비한 빛을 내는 반딧불이가 반겨주던 곳. 이리저리 재빠르게 공기 속을 가르며 현란한 군무를 선보였지. 봄에는 여러날 쪼그리고 앉아 엄청 많은 쑥을 캐었고. 이 시간과 공간이 참으로 귀하고 여유롭다.
인적 없는 길 한복판에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멀리 펼쳐져 있는 산들도 바라보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들로도 시선을 옮겨본다. 고즈넉한 가을 벌판. 넋 놓고 멍하니 시선 닿는 끝부분에 내 마음을 보내 본다.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말 한마디가 툭 날아온다.
"머 하능교?"
순간 반사적인 몸짓으로 고개를 홱 돌려 보니 방한모자까지 갖춰 쓴 할아버지 한 분이 내 곁을 휙 지나간다. 그 말 한마디를 던졌을 뿐 나의 어떤 반응에도 관심 없이 당신의 산책로를 따라 점점 작아지는 등을 보이면서 멀어져 갔다. 아기처럼 단순해 보이는 노인의 뒷모습에 한 동안 시선을 빼앗기다가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좁은 마음을 내려놓으니 입가에 무심한 미소가 떠오른다.
인적 없는 산책로의 한 복판에 멍청하게 서 있는 낯선 여자를 향해
"머 하능교?"
인사 한마디 던져놓고 총총히 자기 갈 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 어떤 위협도 치근덕거림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한 폭의 수채화. 그분만의 아주 독창적인 인사말.
"안녕하세요?"
가 아닌
"머 하능교?"
이곳 지방 도시 함안군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편안하고 활달한 편이다.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무관심과 경계심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대도시 사람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분위기이다.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사람보다 자연이 더 많이 둘러싸고 있는 넉넉한 주위 환경 덕분이 아닌가 싶다. 서로 부대끼며 자기에게 허용된 좁은 공간을 지키기에 급급한 익명의 타인들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 주고 인내해 주며 묵묵히 밟혀 주기도 하는 무심한 자연, 푸르고 편안하게 사람들의 어떤 눈길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자연이 더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 무심한 자연을 향해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마구 소비하고 함부로 내버린 쓰레기들이 마음을 많이 불편하게 한다. 차도 옆 풀밭마다 어지럽게 던져져 있는 재활용 쓰레기들. 각종 쇠붙이 깡통들과 플라스틱 음료수병, 패트 생수병들 그리고 비닐포장지들. 겉으로는 녹색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면 어디에고 할 것 없이 길가 거의 모든 풀밭이 그런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몇 년이 더 흘러 그 쓰레기들이 두터운 층을 이루며 땅의 숨길을 막아 버려도 이리 건강한 풀들이 계속 자라날 수 있을까? 수영장을 오가는 둑길, 춘곡을 오르내리며 걷는 논길, 차도 옆 풀밭. 어디에나 여기저기 던져져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들. 옥에 티처럼 거슬린다. 눈에 보이는 대로 주워서 재활용 분리수거로 처리한다. 어디에선가 읽은 우화 한 편을 떠올리며ᆢ
산에 큰 불이 났다. 불을 끄느라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헬기까지 동원되어 물을 뿌려대었다. 그런데 조그마한 벌새 한 마리가 근처에 있는 저수지를 바쁘게 오가며 부리에 물을 머금고 와서는 불길을 향해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걸 보고 다른 동물들이 비웃었다.
"뭐 하는 짓이야?"
벌새가 대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그 벌새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도 이 벌새와 친구 되리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아파트 뒷 담벼락에 쌓여 있는 담배꽁초들을 쓸어 담고 길가 배수구를 완전히 뒤덮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아파트 앞 대로변에 굴러다니는 캔, 페트병, 비닐 과자 봉지들을 주우리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눈길 닿는 모든 곳에 펼쳐져 있는 풍성한 자연이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려내는 고마운 선물이기에.
201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