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먹는 저녁 식사.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을 한차례 휘둘러 본다. 크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 이제 하루 일과가 대강 끝났다.
음식 쓰레기를 챙겨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1층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장마비에 한껏 무성해지고 싱싱해진 아파트 정원수들의 강렬한 생명력이 전해져 온다. 나른했던 일상이 순간 반짝 빛난다.
수은 빛 조명등들의 불빛도 신선하다. 서늘하니 불어오는 여름 밤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하다. 그냥 다시 휙 들어가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정원수 밑 한 귀퉁이에 쓰레기통을 챙겨 두고 무작정 단지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아, 여름밤이 이렇게 넉넉하고 좋구나.
놀이터를 적당히 채우고 여기저기 뒤뚱거리는 어린아이들과 그 뒤 벤치에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젊은 부모들. 코로나-19로 인해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영 어색하지만 그러나 어쩌랴, 세월이 이리 요상해져 버린 것을ᆢ.
나보다 19살 많으신 우리 집 장남, 큰오빠는 외향적이고 문과적 성향이 강했다. 안방과 그 앞 마루 옆에 나란히 자리 잡아 마당을 향하고 있는 중간방. 작은 부엌까지 하나 딸려 있는 그 방이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결혼하신 큰오빠의 보금자리였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의 그 방 한 쪽 벽에는 3층짜리 커다란 호마이카 전축이 놓여 있었다. 전축 가운데 칸에는 유성기라 불리던 턴테이블이 자리잡고 있었고 밑칸에는 남인수의 노래를 포함한 레코드 판들이 꽂혀 있었다. 거의 항상 열려 있었던 방문을 통해 마당으로 울려 퍼지던 구성지고 간드러지던 그 시대의 유행가들.
그 방에는 수시로 동네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동네 토박이 2,30대 청년들의 모임, '가야 청년회'의 모임이 종종 열렸다. 성실 근면을 상징하는 개미 배지를 제작해서 옷깃에 하나씩 꽂아 달고 저녁마다 모여 앉아 뭔가를 의논하곤 했다. 회칙을 정하고 활동을 논의하는 모양이었다.
끝나고 나면 수박이나 참외, 사탕 같은 간식들을 나누었다. 모임에 참석하러 오는 청년들이 사서 들고 와 부엌에다 들여놓았다. 엄마나 올케언니가 상을 차려냈다. 물론 꼬맹이 우리들 몫도 떨어졌을 것이다.
설, 추석 명절 때면 온 동네 어르신들께 인사를 다녔다. 흰 고무신이나 사탕 봉지를 하나씩 전해 드리면서 절을 하고 잠깐씩 안부를 묻는 대화 시간을 갖는다. 명절빔을 차려 입고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오빠가 방에서 나올 때까지 그 집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기다리다 오빠가 나오면 함께 또 다른 옆집으로 향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68년 여름방학. 오빠가 회장이었던 가야 청년회가 야학을 실시했다. 조선일보 가야 보급소에서 총무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던 동아대학교 학생이 영어 선생님으로 선발되었다. 친절하시고 조금은 미남이셨던 황 선생님. 해가 지고 제법 어둑해진 7시경 시작해서 2시간 가량 영어, 수학 2과목을 가르쳤던 것 같다. 장소는 가야 국민학교 교실. 수업료는 무료.
수업도 수업이었지만 끝나고 난 뒤 남학생 여학생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여름밤, 넓은 국민학교 운동장을 독차지하고 노는 것이 더 재밌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녀유별, 남학생 반 여학생 반으로 갈리고 입시로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더더욱 눈 내리깔고 내숭 떨던 시절이었다.
컴컴하게 멀리서 윤곽만 보이는 넓은 흙 운동장에서 같이 짝지어 그네도 타고 미끄럼도 타고 다망구 놀이도 했다. 교복 입고 앞만 보고 다니던 내숭 1호 나에겐 정말 좋은 추억 재산이 되었다. 낮에는 선생님이 일하시는 신문 보급소로 놀러 가기도 했다. 책상 하나와 쌓여 있는 신문들로 빽빽한 좁고 더운 흙바닥 사무실로 선생님께 시원한 얼음 주스를 타다 드리기도 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러 여름 방학이 끝날 때쯤 평가 시험도 쳤다. 회장인 큰오빠가 운동장 단상에 올라 성적 우수 학생에게 주는 노트와 연필 등을 나도 받았다.
그 인연으로 여름, 겨울 방학 때만 되면 열 명 정도 팀을 짜서 황 선생님께 과외를 했다. 어느 한 친구의 집, 마루를 빌려 조그만 칠판 하나를 걸어 놓고 그 앞에 놓인 기다란 앉은뱅이 나무 책상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선생님은 칠판 옆에 놓인 조그만 의자에 앉으셨다. 교과서 위주의 엉성한 예습을 조금 했던 것 같다.
교복 이외의 사복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시절. 집복인 치마와 셔츠 차림으로 수업 시작보다 훨씬 일찍 모여 땀 뻘뻘 흘려가며 그 집 마당에서 놀았다. 게다라고 불리던 나무 나막신 슬리퍼를 끌고 탁구채처럼 생긴 나무 주걱으로 플라스틱 베트민튼 공을 쳐 넘기는 놀이가 유행이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그 게다짝의 나무판이 다 닳아 두 조각으로 딱 쪼 깨져 버리곤 했다. 대충 수업이 끝나면 어둡고 시원한 골목에서 또 놀았다. 내성적이고 비활동적이었던 나였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도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혼자서 웃음 지을 수 있는 추억의 시간들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모든 여건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하고 부족했던 1960년대 여름밤. 지금은 연락 끊긴 지 오래지만 그때 많이 웃고 많이 놀며 함께했던 친구들이 새삼 그립다. 우리보다 열 살 정도 많았을 황 선생님의 근황도 궁금하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하시길 소망해 본다.
2020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