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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10. 2021

마지막 수업

   후회 줄이기

  

 여러분, 이것이 저와 여러분과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모든 알자스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로만 수업을 하라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왔기에 내일은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 겁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입니다.

 

 나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라니, 이제 겨우 쓸 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더는 배울 수 없다니, 여기서 그만두어야 한단 말인가?

 새둥지를 찾아다니거나 자르 강에서 얼음을 지치는 데 정신이 팔려 수업을 빼먹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읽기 지루하고 들고 다니기 무겁기만 했던 나의 문법책과 이야기 성경책이 이제는 헤어지기 힘든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지막 수업> 알퐁스 도데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함안으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나는 항상 성당 미사 시간에 허겁지겁 쫓겨 다녔다.

 출발하려고 하면 정리해야 할 집안일들이 어찌 그리 눈에 많이 띄는지. 나와 있는 양념통은 싱크대 서랍 속에 들어가야 하고 완전 건조되어 뒤집어져 있는 큰 냄비도 바로 제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시간은 휙휙.

 분명히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뭘 하느라 어슬렁거렸는지 성당 출발 시간이 되면 항상 촉박해진다.


 급하게 발을 찾아 신고 후다닥 현관문을 나서면 그때부터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성당 로비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성전에 도착하면 아슬아슬 몇 남지 않은 빈자리를 찾아 슬라이딩하듯 자리에 앉는다. 곧이어 바로 시작되는 입당 성가 소리를 들으며 휴우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어떤 때는 이미 닫힌 성전 문 앞에서 전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문틈으로 훔쳐보다가 입장하기 좋은 타이밍을 골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르르 스며들어 시치미 뚝 떼고 전례를 따라간다. 나처럼 지각한 두세 명이 문 밖에서 겸연쩍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잠깐 뜸을 들이다 상체를 숙이고 조심조심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무겁고 커다란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가  비어 있는 귀퉁이 뒷자리를 겨우 하나 찾아 앉는다. 신부님 강론 시간에는 스르르 긴장이 풀려 설핏 졸기까지 한다.


 시골에서의 2년 동안은 지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함안군 가야읍에 있는 성당으로 주위에 흩어져 사는 여러 지역의 교우들이 사방에서 모여든다. 대부분 차편으로 일찍 일찍 움직인다. 나처럼 도보 거리에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미사 시작 10분 전에 가도 성당이 꽉 차 있고 신자들은 조용하게 미사를 기다리고 있다. 미사 시작 5분 전부터 물밀듯 밀려와 순식간에 성당 좌석이 꽉 채워지는 도시 성당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성당 왼쪽 좌석의 반, 그러니까 전체 좌석의 8분의 1 정도는 근처 장애시설 교우들의 전용 좌석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들도 항상 지도 수녀님들과 함께 일찍 봉고차로 와 있었다.

  나도 일찍 일찍 성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로 인해 성가도 화답송도 전혀 소리 내어 하지 못하고 마스크 쓴 입을 꾹 다문 채 듣기만 하는 일방통행 미사를 하게 되었다.

 성당 입구에 비치되어 있던 성가책과 성경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손 소독제와 체온 측정 봉사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성당에서 제작, 배부해 준 바코드도 챙겨 들고 다니며 출입 명부를 작성해야 했다.


 주일미사 후 왁자지껄, 풍성하게 펼쳐지던 식당에서의 점심 식사 봉사가 없어졌다. 바람 솔솔 부는 키 큰 나무들 사이, 넓은 마당 천막 아래 자리한 나무 식탁 위에 늘 차려져 있던 떡이나 간식 접시도 사라지고 차나 음료수 봉사도 깡그리 자취를 감추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점점 썰렁해지는 미사.


  그것도 잠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로 접어들며 굳게 닫힌 성당 문 앞에서 그냥 돌아서야 하는 간이 왔다.


 낯선 들판에 홀로 버려진 느낌,

 부모님이 계시는 푸근한 고향집이 사라진 느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났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하게 땡땡이치며 소홀히 했던 모국어 수업.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마지막 수업.

 

 찾아가기만 하면 그 자리 그 시간에 늘 있었던 미사. 그것이 문을 닫을 줄, 그것이 길이 막힐 줄 상상이나 했던가?

 귀한 것을 이리 쉽게 잃다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ㅡThe Road> 떠올랐다.

 화산 폭발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거대한 화산 폭발에서 생겨난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땅을 덮고 공간을 떠돈다. 태양의 빛과 열이 그 힘을 잃고 깨끗한 물과 공기와 흙이 사라진다. 암흑의 시간이 길어지자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죽음의 길을 밟는다. 생명의 터전인 자연이 회복탄력성, 자연치유력을 잃은 것이다.

 인간의 모든 존엄성을 박탈당한 채 오직 목숨만 붙어 있는 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죽음으로 뒤덮인 땅.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캄캄한 절망과 고난의 세계. 더 이상의 생산은 없어도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소비는 이루어져야 하기에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야 하는 제로섬(Zero Sum)의 섬이 되어 버린 지구.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하는 이 코로나의 세월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어 다시 성당 문이 열리던 날부터 과거 습관보다 30분 앞당겨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참석 가능한 인원이 수용 가능 인원의 10분의 1로 줄어드는 바람에 미사 시작 20분 전이면 이미 자리가 다 차 버리기 때문이다.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낯익어 온 정겨운 교우들과 반갑게 인사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생명수가 되는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고 소홀히 했던 시간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을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마지막 수업>.

 극심한 재앙 속에서 새삼스레 평범한 일상의 귀중한 가치를 절절히 느끼게 되는 <로드>.


 그런 황당하고도 암담한 일을 겪으며 후회로 가슴 아파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지금, 여기'를 놓치지 말자고 조용히 내 마음과 새끼손가락을 걸어 다.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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