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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16. 2021

 Secret

    사랑의 비밀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연극을 한 편 보기로 했다. 젊은이들의 거리라고 알려져 있는 혜화동 대학로로 향했다.

 2013년 10월 2일 오후 2시. 탑 아트홀. <시크릿>.


 기온은 서늘했고 날씨는 맑았고 연회색 보도블록으로 깔끔하게 새 단장한 마로니에 공원은 정겨웠다.

 오래된 나무들은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풍성한 가지들을 흔들며 젊은 대학로의 분위기를 더 청량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바로 눈에 뜨이는 안내 센터에서 약도를 구해 공연장인 소극장 팝아트 홀을 쉽게 찾아갔다.

 2009년 1월부터 정기 공연하고 있다니 작품의 완성도를 기대해 볼 만했다.


 좌석번호를 받아 들고 담당자가 안내하는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5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듯, 문자 그대로의 소극장이 나타났다. 표를 예매한 친구의 정보에 의하면 관객을 많이 참여시키는 작품이라길래 섣불리 지명당하지 않으려고 뒤로 뒤로 앉는다는 게 겨우 무대에서 세 번째 줄이었다. 우리 앞 두 줄이 거의 텅텅 비어 있으니 더 뒤에 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나마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 진행자의 채근으로 한 줄 더 앞으로 당겨 앉았다. 짬짬이 들어온 젊은 관객들과 함께 겨우 10명 정도의 관객이 채워졌다. 휴대폰을 꺼 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막간마다 힘찬 박수를 쳐 달라는 간청이 여러 번 반복된 후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다.


 줄거리


 ㅡ사랑하는 여인을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떠나보낸 실연의 아픔으로 그만 미쳐 버린 남자 이광남. 자신을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정신병원 301호 환자이다. 그런 이광남을 데리고 화성(火星) 택시를 운운하며 장난만을 일삼는 장성만은  대체 증세를 측정할 수 없는 중증 똘기 환자이다. 그 둘의 쇼에는 지켜보며 때로는 같이 놀아 주는 발랄 푼수 간호사 진선미가 함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병원에 새로운 여의사 서인영이 부임되어 오는데ㆍㆍㆍ


 이상은 연극의 공식 인터넷 카페 <연극 시크릿>에 소개되어 있는 줄거리이다.

 그다음을 내가 이어 볼까 한다.


 서인영은 대학 시절 이광남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 집안의 반대로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어느 날 부모님의 강요로 국회의원인 어느 남자와 약혼을 했다는 국제 전화 한 통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헤어진다.

 세월은 흘러 이광남은 이별의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해 정신병원 환자가 되어 일 년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병원으로 정신과 의사가 된 서인영이 나타난다.

 그녀는 최면술 치료이광남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고 병실 한 귀퉁이에 의도적으로 녹음기를 남겨 놓는다. 녹음기를 이용해 자신은 도저히 이광남을 잊을 수 없어서 집안이 정해 준 남자와 파혼을 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이광남 당신을 찾아왔으니 어서 건강을 회복하라는 사랑의 고백을 한다.

 그 고백에 힘입어 이광남은 정신병을 극복한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좀 더 자신을 발전시킨 후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이광남이 새 출발을 시작하는 해피엔딩으로 극은 끝난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의 주제가 그러하듯 이 작품도 주제는 사랑이다. 먼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왜곡된 사랑의 어두운 면과 진실한 사랑의 밝은 면, 아픔과 기쁨, 상실과 획득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 연극의 주인공들은 순수한 청년기에 서로에게 몰입하는 에로스적 사랑을 거쳐 오며 주위 환경의 강요에 의해 이별로 몰리지만 결국 자신을 도로 찾고 서로의 사랑에 신의를 지키고 최선을 다하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성장하고 있다.


 주인공 둘만의 사랑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보충하기 위해 또 다른 환자 장성만과 노련한 간호사, 발랄 푼수 진선미를 엑스트라로 출연시킨다.

 그 둘은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연극의  아기자기한 맛을 더해 준다.


 극작가는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설정하여 현실과 몽상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임의성으로 뻔한 스토리에 느슨해질 수 있는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무대의 소품을 바꾸기 위해 잠깐잠깐 조명이 어두워지는 때를 빼고막간의 휴식 시간도 없이 75분 간 연극은 계속 이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발음도 분명해서 대사 전달이 완벽했다. 네 명의 배우만으로 75분을 이어가는 것이 만만치 않을 텐데 빈틈없이 각자 제 역할을 완벽하게 잘 연기해 내는 덕분에 끝까지 연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주인공인 이광남과 서인영 역을 받은 두 배우는 그 캐릭터에 딱 맞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었다. 혼자 창 밖을 향해 울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정남 이광남은 어느 순간 또다시 정신착란증 대통령으로 둔갑하는 이중인격의 연기를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내었다.

 그의 연인 서인영이 처음 무대에 등장한 순간, 무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뿜어내는 애틋한 사랑의 아픔으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회한과 안타까움과 간절한 사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뛰어난 연기력이었다.


  조연으로 출연하는 장성만과 진선미도 거기에 걸맞은 연기를 훌륭히 해내었다. 특히 간호사 진선미의 유연한 몸짓과 장면 장면 변신하는 그 연기는 일품이었다.

 겨우 열 명 남짓한 적은 관객을 앞에 두고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공연에 최선을 다하는 배우들이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이런 것을 프로라고 하나 보다.


 극 중 대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것을 사람들은 철들었다고 표현하지.'


 이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철이 든 사람은 여주인공 서인영이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부모의 강요로 서로 사랑을 약속한 애인, 이광남과 결별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 의대 공부를 하면서 국회의원인 남자와 약혼한 서인영.

 그러나 그녀는 그 운명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그 약혼을 깨고 첫사랑 이광남을 선택하는 철드는 시간을 걸어온다.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랑의 상실인해 영혼이 깨어져 버린 한 남자를 치유하고 구원하며 자신의 행복도 되찾는다.


 이 극 중에서 두 명의 정신병 환자가 남자이고 나머지 두 명의 건강한 생활인이 여자인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설정된 극 중의 배역일 뿐일까?

 그 설정이 관객인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만큼 남자에게 주어지는 삶의 무게가 더 무거운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오랜 사회관습상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온 여자들이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자기 성찰과 건강한 뿌리내림에 더 쉽게 더 빨리 다가가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며 상대가 아파하거나 어려워할 때 그 고통에 동참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는 아름다운 관계가 주는 감동.

 행복한 사랑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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