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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한 스컹크 Jan 05. 2024

품고 있는 날개

나이 서른, 유학을 결심하다.

나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악착같이 회사에서 버텼다.


이제 나이가 서른이 되었으니 주위에서 슬슬 결혼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비정규직이니 안정적인 남자를 만나서 얼른 시집을 가라는 꼰대들이 많아졌다. 

내가 만약 이대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며칠을 고민하고 또 생각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그러다가 문득, 이대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살게 된다면 나는 해외에 나가보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해외에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래서 주말에는 유학박람회 등을 다니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에다가 힘들게 모은 돈을 혹시라도 사기를 당할까 봐 유학원을 돌아다니며 상담을 받아도 쉽게 결정을 하기 힘들었다. 인터넷으로 해외생활과 유학생활을 보고 조사하며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국으로의 출발이 무서운 마음이 공존했다. 겨우 떠난 해외에서 사기를 당하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빠가 갑자기 돈을 보내줄 수 없다며 힘들게 하면 어떡하지? 잘 계약한 줄 알았던 집이 사실은 사기라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유학을 알아본 지 어느덧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친구가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한 유학원을 통해 언어연수를 잘 다녀왔다며 그 유학원을 소개해줬다. 

주말에 약속을 잡아 유학원에 상담을 다녀왔다. 이번에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리저리 알아보며 몇 주 후 다시 상담받은 과장과 통화를 하며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려면 어느 컬리지에 어느 과를 가야 하는지 상담하고 끊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10번도 넘는 상담에 과장은 힘들었는지 일단 영어점수는 있냐고 물어봤다. 

‘없는데요..’ 그럼 일단 영어점수부터 만들라고 했다. 

무슨 컬리지던, 어떤 전공이 던지간에 일단 영어점수가 있고 성적이 돼야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영어점수 만들기에 돌입했다. 솔직히 토익은 항상 LC가 거의 만점에 가까웠고 RC는 어느 정도 나왔으니 영어점수를 만드는 것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며 영어점수를 만드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고 처음 접해보는 IELTS라는 시험은 영어시험이 아닌 외계어시험 같았다.


일의 특성상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해서 잠을 잘 시간도 부족했다. 퇴근 후에는 만사가 귀찮아 마냥 늘어져있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나를 채찍질해 주는 고마운 꼰대들이 있었다. 나의 위치를 잊지 말라고 채찍질도 해주고 나의 미래를 우울하게 그려주는 고마운 동료들 덕분에 나는 하루에 2시간씩 잠을 자며 열심히 영어시험을 준비했고 그렇게 3개월 만에 웬만한 컬리지에 있는 과는 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만들었다. 

이제 전공과 학교만 선택하면 된다. 


3개월 만에 전화해 유학원 과장님과 다시 상담을 했다. 

과장님은 안경학과와 약사보조 학과를 추천해 줬다. 나는 안경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과장님은 안경을 파는 게 아니고 작업실에서 안경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사보조 학과는 내 영어점수가 부족해 입학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작업실에서 안경만 만들어서 주고 콘택트렌즈만 골라주면 땡이라고? 기본 월급도 나쁘지 않고. 영주권도 잘 나오는 직업이라고 하니 이 전공을 선택하기로 했다.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고 비자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피 말리는 3개월이 지났고 비자는 무사히 나왔다. 이제 나는 당당하게 사직서를 내면 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시간인가.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인가.

나의 퇴사 소식에 사람들은 모두 벙쪄했다. 당연히 무기계약직을 바라는 호구인 줄 알았는데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니. 다들 나를 찾아와서 정말이냐며 합격증을 보여달라는 사람, 여태 곰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여우짓을 다 하고 있었다며 가증스럽다고 대놓고 욕하는 여직원들, 캐나다가 아이들이 살기에 그렇게 좋다던데 하며 자리 잡고 자기한테 꼭 연락해 달라고 친한 척하는 사람들까지, 반응은 다양했고 가소로웠다.


내 유학소식에 당황한 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은 월급도 적었고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 했다.

이제 큰돈이 나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빠는 유학자금을 보조해 달라는 나의 말에 화가 났고, 늙고 약해졌다고 생각한 엄마는 자식 중 한 명이 멀리 떠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나를 말렸다. 오빠는 나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를 했는데 갑자기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 서운함과 우울함으로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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