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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9. 2022

생활 에너지에 얽혀 사라진 것들을 그리며

생활 에너지에 얽혀 사라진 것들을 그리며

  2014. 1. 20 

 

나무꾼과 선녀는 더 이상 없다


‘삶은 불때기’다. 


실제로 아주 먼 옛날부터 땔감확보가 곧 삶이었다. 한국사람은 추우면 살 수 없고, 살려니 온돌에 불을 때야 하고, 불을 지피자니 불씨를 보존하는 화로가 필요하고, 음식을 익혀 밥을 해 먹자니 불을 때야 한다.

 선녀와 나무꾼 얘기에서 알 수 있듯, 땔나무 해다 파는 나무꾼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 아닌가 싶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도 나무꾼이라도 해서 연명하지 않았던가. 이러니 인간의 삶은 ‘불때기’ 아닐른지….

하지만 이제 세상에는 난방을 하건 취사를 하건 ‘불 때는’ 수단이 많이 생겼으니, 더 이상 나무를 해다 팔 일은 없다. 더 이상 선녀와 나무꾼은 볼 수가 없어졌다. 그들은 그야말로 ‘옛날 얘기 속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이 참에 독자 여러분께 아재개그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한다.

"추울 때 제일 좋은 게 무엇입니까?"

정답은, "따신 것"입니다.


따끈한 화로가 사라졌다 

  성냥이 아직 없던 시절에 부엌에 불을 때려면 불씨를 살려 두어야 하니 화로가 필요했다. 화로는 불씨도 보관하고, 방에서는 난로 역할을 겸했다. 애기 때 나는 외가에서 외할아버지랑 놀다가 화로에 빠져 배에 화상을 입었는데, 지금도 내 배에는 그 지도가 남아있다. 나의 화로에 얽힌 ‘아픔을 잊은 아픔’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는 화롯불에서 불을 붙여서 솥 아궁이에 불을 지폈으니, 화롯불이 꺼지면 집안이 망할 것처럼 여길 정도여서 불씨 보존을 잘 해야 했고, 불씨 꺼진 집에서 남의 집에 불 좀 얻으러 오면 복이 나가는 것으로 여겨, 그 집에서는 냉큼 잘 주려 하지 않았다.

 이제 화로와 불씨는 골동품이거나 옛 얘기가 된 지 오래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다황과 라이타 돌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 다황(성냥)이 엄청 사라졌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그 노래를 많이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들을 놀리는 것이라 노래는 속되지만, 못사는 서민들의 울분을 발산시키는 그 짓궂으면서도 애잔한 노래는, 노래 질의 좋고 나쁨에 대해 시비를 가릴 필요 없이, 군대에서도 목청이 터져라 불러 제켰지. 그런 삶을 떨쳐내야 한다는 듯.

 그 공장에서 나온 큰 6면체 4각이나 6각현 성냥 통이 그만 그 큰 화로들을 집에서 몰아내듯 쫓아냈다. 화로에서의 불씨 보관은 하루 아침에 날아간 거지. 성냥은 우리 고장에서는 ‘다황’이라 불렸는데, 이 이름도 곧 사라지겠지? 그 때 휴대용 성냥갑은 점점 더 작게 예쁜 모양으로 다양하게 생산되어, 특히 다방을 중심으로 디자인이 독특한 것들이 많아지자, 그걸 수집하는 사람들도 많던 시절도 있었지.

 그리고 라이타. 

학교다닐 때, "홍콩에 주문한 라이타 돌 일곱 가마니만 들어오면 한 잔 크게 사지"라고 농담하던 말이 있었다. 그 라이터 돌이 바로 불씨가 된다. 성냥만큼이나 발달한 라이타. 라이타 돌만 갈아 넣고 항공유만 보충하면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라이타. 그 땐 그 신식 부싯돌인 작은 라이타 돌 하나를 새 걸로 사서 가는 데도 크기에 비해서는 돈이 너무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일곱 가마니를 풀어서 소매로 팔면 그 돈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그려. 이번에는 라이타가 좋은 불씨가 되어 성냥을 뒷전으로 밀어내어버렸지. 억울하겠지만.


 장죽과 봉초, 부싯돌도, 할아버지 호통도 사라졌다

 밭에서 키운 담배의 잎을 따다 말려서 잘게 썰어 긴 대나무 담뱃대 끝의 꼬가리에 넣어 불붙여 피우던 엽초 담배도 사라졌다. 삶의 에너지인 담배. 

후에 잘게 썬 봉지 담배가 나왔다. 애기 베개만큼(?) 큰 ‘봉초’가 나오니, 남몰래 재배하던 담배밭이 사라졌다. 한 때 긴 담뱃대는 선비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고, 노인의 상징이기도 하고, 할머니들의 짧은 담뱃대는 화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어도, 점차 냄새도 독하고, 거추장스럽게 그거 쓰는 사람 없어지고 말았어. 그러더니 전매청 개비 담배가 휴대하기 좋은 담배 갑에 포장되어 나오면서 봉초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지. 

후일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 청바지 천에다 팍 그어도 불이 탁 붙는 기막힌 딱성냥도 나왔고. 그 때 '라이터'하면 'Zippo'가 최고 인기를 차지하였는데, 무슨 전쟁영화에서 불 붙인 Zippo를 던져서 적진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오면서, 아무리 센 바람 앞에서도 꺼지지 않는 신기한 라이터에 매료되기도 했어. Zippo는 지금도 애연가들에게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마는, 약간 비싸서 아무나 소지하지 못하는 명품 라이터였다. 나도 연애시절에 지금은 아내가 된 아가씨에게서 선물로 받은 명품 라이터 찌뽀를 가지고 폼 깨나 잡았지.

그러던 중에 드디어 서민적 애연가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드는데, 1회용 플라스틱 가스 라이터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할아버지들이 휴대하시던 긴 담뱃대와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시는 쑥과 부싯돌은 이제는 없어졌다. 내 나이 또래들이 그것들이 사라지던 현장, 그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 몸으로 행하면서 산 사람들이다. 

할아버지가 모침에 빈득하니(비스듬히) 누워서 문 담배 꼬가리(장죽 끝에 담배를 넣는 작은 금속 그릇)에, 부싯돌을 안 쓰고 대신 1회용 가스 라이터를 들이대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가지고 척! 하고 켜서 불을 붙여드렸더라면, 할아버지는 얼마나 놀래셨을까? 

너무 놀래신 나머지 "이놈아,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면서 등싸대기(등판)에 누린내가 나도록 '담배 꼬가리 호랭이(호랑이)' 그 장죽으로 후려 치지는 않으시겠는가 말이다.

할아버지의 그 무섭고 위엄에 찬 호령도 사라졌다. 그립다. 담배는 안 피워도 이제는 내 몸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날 나이가 되었다.


 재 사용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언제냐 그게? 담배를 한참 피우던 내가 일본에 연수 받으러 갔을 때 ‘그 놈’이 나타났는데, 난 정말 깜짝 놀랬다. 색깔도 다양해서 예쁘고, 가볍기도 하지만, 아니 ‘1회용’ 가스 라이터라니? 

그걸 다 쓰고 나면 그 아까운 걸 그냥 버린다고? 그래서 더 놀랬다. 그 라이터의 등장이 바로, 언제나 모든 물건을 아끼고 또 아껴서 재사용에 익숙하던 우리들 생활에서, 한 번 쓰고 버려도 되는 1회용이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자리잡게 한 제품이 된 것 같다.  소비의 미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허허. 

 그것을 아까워하던 중에, 아닌 게 아니라 1회용과 똑같은 것에다 가스를 Refill할 수 있는 제품이 나오긴 했지만, 수명이 길지는 못했다. Refill용 가스 통을 별도로 사야 하는 것도 귀찮고,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1회용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가격도 많이 내려가서 부담이 적어지니, 재사용보다는 결국 1회용이 자리잡고 말았는데, 오늘에도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다. 

파스텔 색깔의 가벼운 라이터, 액체연료가 얼마 남았는지 다 보이는 반투명제품이라 편리하기도 했다. 다 쓰고 쓰레기 통에 탁 버릴 때의 그 쾌감. 그거 참 괜찮아요.    

 이것이 부싯돌-화로-성냥-금속제 라이터-플라스틱제 라이터로 바뀐다. 나무 불씨-유황-기름-가스로 바통을 받아온 것이 '불씨'의 역사다.


 형설의 공이 사라졌다

 조명용 불(빛)은 불에서 나오긴 해도 열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니, 불은 불이래도 난방용이나 취사용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어두울 때나 밤에 책을 읽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불빛이 필요하니, 형설의 공이라고 해서 반딧불에 비추고 눈(雪) 빛으로 공부하였다지 않는가? 

 저 먼 가야시대 유물로 나오는 삼둥이 등잔을 보면, 그 옛날부터 어둠을 밝히는 도구가 사용되었던 것이지. 형설의 공은 그 이전 언제 없어졌겠지. 

그 시대로부터 기천 년 후에 태어난 내가 어릴 때 겨우 등잔 심지 한 개로 살았는데, 선조들은 쌍심지도 아니고 등잔을 무려 세 개나 지닌 등잔을 만드신 걸 보면, 우리 할아버지들보다 훨씬 더 밝게 세상을 사신 거다. 

 우리 집에서는 등잔불 기름을 아낀다고, 안 방과 부엌 사이 벽에 작은 유리를 붙이고 거기 등잔을 올려놓게 만들고는, 등잔불 하나로 두 곳을 동시에 비추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밤중에 비치는 희미한 등불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밝지요. 허허.

 그런 가운데, 공부가 무슨 벼슬인 것처럼, 쬐끄마한 기(꼬마 녀석이) 등잔불 하나를 독차지하고 공부하던 나는, 책 펴놓고 졸다가 눈썹도 머리카락도 여러 번 까실린(그을린) 추억이 있다.

 등잔 심지보다 크기가 커서 훨씬 밝은 램프불은 기름을 많이 먹으니, 시골에서는 그것도 잘 쓰지 못했다.

 등잔불과 램프불. 이젠 일상에서 사라졌다.


 고콜도 관솔불도 사라졌다

 옛날에는 밤에 길쌈을 매려 해도 불빛이 없으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화톳불을 응용한 작은 고콜이 안 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고콜은 네모난 방 한 쪽 모서리에 관솔 불을 피우고, 연기가 방 밖으로 빠지는 연통을 만들고, 사람 가슴 높이에 관솔을 올리는 돌 판을 놓아, 방을 밝히는 벽체 붙박이 조명도구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작은 초가집에도 굴뚝이 두 개가 있었으니, 부엌-구들-굴뚝을 통하는 큰 연풍도 굴뚝이 하나 있고, 안방에서 바로 방 밖으로 빠지는 작은 조명용 불을 위한 굴뚝도 있었던 것이다. 

 그 고콜도 등잔불과 공존하다가, 새마을 주택개량사업, 전기 도입으로 함께 세상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고콜! 그거 아는 이 얼마나 살아 있을까 지금 이 세상에?

‘소깽이’라 부르는 관솔은 소나무 가지에 상처가 났을 때 오랜 시간 맺힌 송진 성분이 배인 부분으로, 색깔이 발그레하니 맑게 보여 예쁘다. 그런 부분을 채취해다 도끼로 잘게 패서 관솔로 썼다.

관솔. 정월대보름에 아이들이 구멍을 뚫은 깡통에 꽉 채워서 달맞이 만월놀이를 할 때도 쓰고, 바다나 물가에서도 불빛을 비춰 생선이나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던 조명연료로, 일반 나무보다 잘 타고-오래 타고-잘 꺼지지 않았다. 관솔도 이제는 건전지를 쓰는 랜턴 후래시나 이동용 발전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멀리 사라진 것 같다.   


  길쌈을 매며 물레를 잣던 할머니들도 다 가셨다

 우리 집에도 있던 고콜. 거기에 마알간(맑은) 송진을 머금은 소깽이(관솔)를 잘게 짜개서 불을 밝히면, 그 불빛 아래서 내 할머니도 이웃집 할머니도 같이 모여서, "영감하고 같이 자던 시절이 제일 좋았지 뭐" 라면서,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던 그 밤이 기억에 선하다. 

 할머니들은 한 쪽 다리는 허벅지를 다 드러내 놓고 앉는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삼베 실 한 끝과 이을 실의 한 쪽을 잇는다. 침을 묻힌 손바닥으로 허벅지 위에서 두루루 비벼 말아서, 끝없이 이은 것을 모아 물레를 잣곤 하셨지. 수십 년 전에 길쌈을 매던 그 할머니들은 다 우주로 돌아가셨다.

 그 때 등잔불 시대에도 양초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제사상이나 차례상에만 올라가는 귀하신 몸이 되어 의식이 끝나면 제기와 함께 고이 모셔두는, 생활조명용도로는 쓰지 않는 고급 조명용 물품이었다. 


나무하러 가는’ 것도 거의 사라졌다

196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에서는 힘있는 사람은 누구나 산에 가서 제 힘껏 땔감을 베어가는 것이 일상에서 상당시간을 점유하던 시절이었다. 자기 산도 아닌 남의 산에 들어가서 불법으로 마구 나무를 베어 날랐다. 깊은 산에 가면 산 주인들의 고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왜 남의 산에 와서 나무를 베어 가느냐?"하고 큰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은 도망을 치곤 했다.

 내 고향마을은 첩첩산중 태백준령과 동해바다의 중간 쯤 있어서, 해질녘이면 우리 마을을 관통하는 길엔, 나무를 이고 종종걸음치는 집으로 가는 아낙네며, 무거운 나뭇짐 지게를 진 어른들이 줄을 이었다. 우차(달구지)에다 생 통나무를 베어 싣고 솔가지로 가려 감추어 운반해 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땔감에 관한 한 부자였고, 실제로 그 만큼 집안에 힘쓰는 남자와 소가 있다는 것이니, 삶에는 여유가 넉넉한 집들이었다. 우차를 굴린다는 건 요즘이라면 자가용 트럭을 가진 것이나 진배없었으니, 남들이 많이 부러워할 일이었다. 

그러니 산에 나무가 배겨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무튼 이런 일을 "나무하러 간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어지간한 시골 아니고는 나무하러 가는 일은 없어졌다.


 우차 만드는 기술도 끊어지고 있다

 우리 마을에도 우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얘기는 지금 시대에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무로 된 둥글고 큰 우차 바퀴를 만드는데, 특별히 재질이 야문(단단한) 목재를 이용해서 자전거 바퀴처럼 살도 여러 개 배치하고, 둥근 바퀴 테(Rim)도 나무 토막을 여러 개 조합하여 원형으로 만들어야 하니, 나름 가공기술과 수학이 필요했을 것이고, 베어링도 있어야 하고, 윤활유도 발라야 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자동차 타이어에 해당하는 바퀴 겉 철판을 입히는 것이 중요한데, 얇은 철판의 용접 접합까지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이 역도들이 횡행하지 못하게 도로를 잘 만들지 않아서, 높은 문화 수준에도 불구하고 도로-교통-수레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 국력을 키우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골 우리 동네에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대단하다.

그 어른들은 곱셈 나눗셈을 하셨겠나? 나무와 쇠를 다루는 온갖 공구들은 웬만하면 스스로 만들어 썼을 것이다. 각도기도 없고, 용접기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우차를 만들었는지, 이제는 다 우리 곁에서 떠나고, 아무도 그런 일 할 수 있는 사람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밥짓는 연기 나는 정경을 보기 어렵다

그리 하야, 다 아시는 것처럼 이제는 웬만한 시골에 가도 밥 때에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겨운 장면을 보기 어려워졌으니, 어쩌다가 아주 산골마을에서 연기 오르는 걸 보면 참 반갑다.

  신라 때 경주에서는 숯으로 취사를 했기 때문에, 저녁이 되어도 집집에서 나오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는 글을 읽으면, 숯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다. 숯은 오늘날에도 숯불 갈비에 사용되어, 고급 식사의 상징처럼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취사용 고급 에너지다.

삶이란 사는 형편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어서, 흥망성쇠라는 말처럼 신라처럼 흥했다가 조선 말기처럼 퇴보하기도 하네. 우리의 생활에너지도 숯은 숯 대로 상류에서 쓰고, 숯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자연의 순리대로 세상에 휩쓸려 살아간다. 

 오늘날 숯은 고급 한우 구울 때 쓰니, 역시 숯은 만들기도 힘들지만, 힘든 만큼 고급 연료로서의 가치를 이어가는 생명이 아주 긴 그리고 질긴 에너지다.


 깔비 끌기, 삭다리, 떡꺼지라는 용어도 사라지는 중이다

 그 때는 삶이 땔감이었고, 힘이 곧 생존이고, 힘 있는 만큼 힘껏 나무를 했고, 그 때문에 산은 힘껏 헐벗게 되었다. 지금 서울의 북한산이 아닌 북한의 산들이 헐벗고 있는 이유나, 60년 전 옛날 우리나라 산이나 헐벗은 원리는 똑 같았다. 

나도 할아버지와 나무하러 자주 다녔지만, 무거운 나뭇짐을 얹은 지게를 지고 일어날 때 작대기를 짚고 이를 악물어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거울 때나, 숨이 차서 더 걷지 못할 정도가 되면 어린 것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땔감, 특히 불쏘시개로는 소나무 낙엽 즉 깔비(소나무잎 낙엽)가 최고이니, 어릴 때는 밥 먹듯 뒷동산에 올라가 깍쟁이(갈퀴)로 깔비를 끌러 다녔고, 긴 장대 끝에 낫을 묶어 삭다리(마른 나뭇가지)를 땄는데,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썩은 나무 밑둥을 발로 탁탁 몇 번 걷어 차서 뽑아내는 썩은 나무 등걸 떡꺼지. 

잘 뽑히지 않으면 가져간 도끼 대가리로 두어 번 탁탁 쳐서 뽑아내는 떡꺼지 캐기는 쾌감도 있었다. 이 모두가 삶을 위해 땔감을 구하는 일이었다.

수백 년 간 우리의 조상님들이 사용하면서 나에게로 대대로 이어져 왔을 '깔비 끌기, 삭다리, 깍쟁이, 떡꺼지' 같은 정겨운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거의 다 없어져 가고, 언제 그 단어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사전에 등재되었으니 단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용자는 없어지겠지.


  농촌계몽활동도 볼 수 없다

  중학생 때 나는 다른 학생들 두어 명과 함께 뽑혀서, 장날에 몇 번 선생님과 장에 나갔다. 마이크에 대고 "산림녹화를 하자"는 내용의 계몽 홍보 선전활동을 하러 다녔다. 장보러 오신 사람들은 꼬마 중학생들이 마이크에 대고 또박또박 떠들어 대던 모습을 바라보며 대견스럽게 여기셨을 것 같다. 

 그 때는 봄이 되면 전교생이 산에 나무 묘목을 심으러 수업을 하지 않고 식목에 동원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은 이런 노력도 크게 효과를 보게 했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들어 산의 나무가 베임의 공포 즉 땔감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드디어 맘껏 자라기 시작했다. 그 공덕은 5.16혁명과 산림녹화에 관심이 많으셨던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있지만, 19공탄의 힘도 무지하게 컸다.

  독일에 나무가 많은 이유도, 아마도 일찍 석탄을 취사와 공장의 연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훗날 독일로 한국 광부들이 들어간 것도 그 연장선일 테니.

 초딩 때 우리 동창 여학생들이 학예회 때 예쁘게 합창하던 노래가 잊어지지 않는다.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불러도 반가이 대답하는…”.

요즘이야 산에는 메아리가 잔뜩 살고 있을 테니, 이 노래 가지고 학예회 발표는 안 할 것 같다. 이 정겨운 노래도 사라지고 있을 거고, 나는 그 노래의 여운을 붙잡고 이리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동네 방풍림도 많이 사라졌다

 중학교 3학년 땐가 그 다음 핸가, 우리 집에도 드디어 전기가 들어왔다. 그 밝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등잔시대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하던 때가 기억난다. 전기로 인해 자연히, 등잔도 램프도 임무를 마치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 거추장스러우니 언젠가 어딘가에 버려졌다. 

 우리동네는 다른 동네보다 몇 년 지각하고 전기를 받았다. 동네에서 비용을 대야 전봇대를 세우는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해. 동네를 반 바퀴 감싸고 도는 300살 이상의 아름드리 방풍림들을 모조리 베어 제재소에 팔아서 비용을 만들었으니, 편리한 전기를 받는 대가가 지나치게 컸다. 지금 그 나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방풍림은 어린 내게 굉장히 많은 것을 주는 생활의 보고였다. 거기에는 땔감도 많았고, 나무의 종류도 많아서 이파리는 따다가 밥에 넣어 식용으로도 사용했고, 향료로도 사용했다. 누에치기할 때 뽕이 모자라면 거기 사는 가시가 있는 황사목 가지를 쳐다 누에를 멕였다.  

 거기엔 야생 찔레도 많고, 딸기도 많고, 복숭아도 있어 허기를 채워줬고, 무엇보다 어린 내가 목낫으로 찍어서 쓸 수 있는 갖가지 장난감용 나뭇가지를 편리하게 제공해 주었던 곳이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내 눈에는 선하게 그려진다. 지금도 고향집 수풀은 꿈에도 가끔 나타나니, 잊어질 수가 없다.

 내 삶의 ‘에너지 수풀’이었는데, 사라졌다. 


 연탄 취사도 연탄 곤로도 거의 없어졌다 

 시골에서나 장작과 검불을 때서 취사를 했지, 도시에서는 오래 전부터 연탄취사에서 석유곤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동형 연탄 곤로도 시장을 중심으로 많이 생겨났다. 이 무렵에는 집안에 새카만 19공탄 100장만 들여놓아도 마음이 부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연탄은 화력도 세고, 연탄 불씨만 안 꺼트리면 좋은데, 한 번 꺼지면 눈물깨나 흘리며 연탄불을 다시 붙여야 했다. 요새는 번개탄이라는 게 있어서 불 붙이기가 좀 쉬워졌는데….

 높은 산에 나무하러 안 가서 좋은 연탄, 산의 나무의 생명을 구한 은인. 그런데 요게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연탄이 숱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연탄가스 때문인데, 연탄 아궁이에서 굴뚝으로 나가는 중간에 온돌 구들장 틈새로 스물스물 방으로 새는 가스를 잡을 수 없어, 내 가족들도 많이 혼났고, 내 친구 하나는 장가도 못 간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 

 하도 사람이 많이 죽으니 그 때 나라에서는 연탄가스 중독사를 막을 방도가 없어, 오죽하면 연탄 가스 중독을 막는 약을 발명하는 사람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했을까! 

그렇게 나쁘기도 한 19공탄이지만, 사실은 연탄이 보편화 된 것은 우리나라 취사연료 역사 상 산의 나무를 살리는 5.16이었다. 그 후로 점차 산은 푸르게 되었다. 실로 그 19공탄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연탄가스 중독사도 거의 사라졌는데 

그러다가 내건 현상금을 수여하지도 못하고, 연탄가스 중독사가 갑자기 없어졌다. 그건 누구의 발명약 때문이 아니라, 비닐 호스를 이용한 연탄 ‘온수 보일러’가 해결해버린 것. 

한국사람들이 참 영리해서, 약을 만들지는 못하니 가스를 피해 간 것이다. 연탄을 사용하되 가스는 방바닥 구들로 들어가지 못하게 격리시켜 따로 밖으로 뽑아내고, 대신 연탄불의 열을 이용해 데운 물을 비닐호스에 넣어 방바닥을 순환시켜 데우는 방식을 쓴 것. 

이제 19공탄은 서민용이나 장사용으로 일부에서 아직 사용하고 있는데, 연탄가스 중독사는 사라졌지만, 대신 새로 생겨난 나쁜 것도 있다. 소위 방문과 자동차 문을 걸어 잠그고, 연탄불 쏘시개용 연탄을 피운 채 그 안에서 생명을 마감하는 일 말이다. 


구들도 연탄난로도 사라졌다

연탄 때문에 오천 년 배달민족이 독특하게 지녀온 온돌의 ‘구들’ 기술은 그 후 그만 거의 시들기 시작한다. 연탄 보일러 난방방식은 곧 전국으로 확대 보급되어, 지방마다 고을마다 보일러 사업은 날개를 단 듯 번창해 갔고, 이 사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많아지더니, 급기야 해외로 수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온수 보일러, 전기 매트, 전기 담요에, 온열 매트 등이 아주 편리하게 방을 뎁혀준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데워 먹던 교실의 연탄난로도, 군대 내무반에서 조개탄을 쓰던 뻬치카도 다 사라졌다. 이제는 시절이 좋아서, 전기난로나 편리한 전기 냉난방이 자리를 차지했다.

 

*2022년 현재

  요즘 나는 겨울에는 잠자리에서 온열 매트를 쓴다. 전기를 꽂으면 펌프가 데워진 물을 순환시킨다. 펌프 소음도 안 나고 컴팩트한 것이 전기장판에 못지않게 좋다. 미니 온수 보일러다.


연탄재도 보기 어렵다 

연탄불 난방은 한 밤중에도 어머니들과 아내들을 고생시키기도 했다. 연탄 갈 시간이 되면 밤중이라도 일어나 나가야 했으니. 연탄재를 미끄러운 길이나 질척거리는 길바닥에 던져두면 오가는 사람들이 밟아서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지. 하도 흔해서 발에 채이는 게 연탄재인데, 그 처치곤란인 연탄재를 두고, "함부로 걷어차지 마라. 너는 언제 남에게 한번이라도 뜨겁게 해 준 적 있냐?"고 어느 시인은 유명한 시를 짓기도 했다. 

연탄재는 전기 만드는 발전소에서도 유용한 때가 있어요. Intake라고, 그 냉각수 들어오는 곳에 물막이 Stop Log를 끼우고 물을 막을 때가 있는데, 물이 자꾸 샌다 이거지. 그 때 연탄재를 뿌려 넣으면 신기하게도 물이 새는 것을 딱 멈추지.

연탄재 속에는 천연 비료 성분이 들어있다. 밭에 던져 놓으면 비료가 되니 농작물이 잘 자랐다.


석유 곤로도 석유버너도 많이 없어졌다 

이러구러 취사는 드디어 기름을 사용하는 석유곤로 시대를 맞이한다. 기름이라는 것이 몇 천년 역사를 지녔는지, 석유는 언제 들어왔는지, 석유 이전에는 어떤 기름으로 등잔불을 붙였는지 궁금하다. 

석유 등잔이니 남포 불(호롱불, 램프 불)로 시골사람들에게도 석유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소량의 등잔 기름에 이어, 석유 곤로로 인해 일상에 대량으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곤로의 심지를 약간 높여서 성냥 알갱이 하나 척 그어 불을 붙이면 처음에는 기름 타는 냄새가 고약했지만, 그래도 밥하는 데 석유곤로 없는 사람은 촌사람이었지. 

연탄불에서 밥하다가 결혼 무렵에 처음 써 본 석유곤로 거 참 좋더군.


  LPG 가스통도 이젠 많이 줄어들었다

가스 취사가 나오면서, 석유 곤로도 저 세상 얘기가 되었고, 석유 버너를 사용한 등산 취사도 이젠 모두들 부탄가스로 식당에서나 야외에서나 편리하게 취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던 저 유명한 외국 메이커 등산용 석유버너도 이젠 바이바이~~.

 연탄불에 라면 하나 끓이는데 20분 걸린다면, 석유 곤로는 15분이면 되고, 가스 불로는 10분이면 족하니, 세상 참 얼마나 좋아졌어!

 석유 곤로는 LPG 가스레인지로 바뀌면서, 이사를 다닐 때면 집집마다 가스통을 같이 갖고 다녔다. 그게 국력이 커지면서 액화천연가스 시설이 대규모로 구축되면서 도시가스 난방과 도시가스 레인지로 변신하였다.

그러니 산에 나무는 점점 더 울창해지고 있는 가운데, 이제는 반대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산불이 났다 하면 초대규모 피해를 입는 지경이 되었다. 강원도 7번 국도를 타고 지나가면서 화마에 민둥성이가 된 산맥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메어 눈물이 나올 지경인 적도 있다. 

 육림정책으로 대규모 간벌을 하기는 해도, 누구도 베어 놓은 나무를 가져가지 않는다. 나뭇꾼이라는 직업은 내 중고등학교 때도 존속했지마는, 이제는 사라지고, 대신 기름을 파는 주유소가 전국에 쫙 깔렸고 가스공사들이 지방마다 생겨났다.   


  중앙난방도 사라지는 중이다

 1977년의 일이니 벌써 오래 전 일이네. 우리 한국전력 사원 일행이 일본에 연수교육을 갔을 때였다. 아파트는 분명 아파트인줄 알겠는데, 집집마다 짧은 파이프가 하나씩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게 뭔지 도통까라 알 수가 없었다. 일행 중에는 건축 전문가도 있었지만 그분조차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집마다 놓인 가스 보일러의 연통이었던 것.

 한국에도 이미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던 시기지만, 주로 중유를 쓰는 중앙집중식이라서 가가호호 원할 때 틀 수 있는 개별 난방 가스 보일러가 있다는 건 상상을 못했고, 게다가 그게 기름도 아닌 청정 가스라는 데는 더욱 경제력의 격차 문명의 격차 삶의 격차를 느꼈다.

 대규모 난방은 기름에서 가스 보일러로 발전하면서, 지금은 지역난방용 복합발전소, 집단에너지사업도 생겨서 도시 전체, 공단 전체에 열을 공급하고 있으니, 나무꾼과 연탄가스는 한 번 더 전설이 되었다. 일찍 죽은 사람, 일찍 태어났던 분들만 억울하게 된 것이다. 이건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대세이니….


 원격조절 보일러 시대이니 보통 보일러도 없어지고 있다

어릴 때는 마당 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집 저 앞에 멀리 떨어져 있는 통시(변소)에 가서, 나뭇가지 엮어서 벽을 두르고 문도 달지 않은 변소에 눈보라는 치지요, 겨울에 바지 내리려면 아아 얼마나 추웠던고. 거시기가 다 얼어서 방으로 돌아오던 일 생각하면, 이젠 집안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으니, 아이고 나의 할아버지는 이런데 한 번 못 살아보시고…!

 이제는 아파트에 집집마다 개별 보일러를 가진지 오래 되었고, 뜨신 물도 맘대로 쓰고, 방안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에 편하게 살고 있다. 

 휴대폰으로 보일러를 원격조절하는 시대다. 한국의 난방 보일러는 세계로 수출도 하고, 어떤 제작사는 그 작은 보일러로 전기까지 만드는 특수 보일러를 생산한다 하니, 참말로 격세지감이다.


  활 에너지의 변천도 진화도 사라지고 있다

  삶은 불 때기다. 

그 생활 에너지인 빛(조명)-불(취사)-열(난방) 에너지의 변천과정에서, 쿠데타를 당한 듯 밀려나 사라진 것들이 그립다. 비록 불편하고 힘든 것들이 새로운 에너지 자원의 개발과 유통으로 편리하게 바뀌고 진화하고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지금은 전기보일러, 전기 히터, 난방용 에어컨, 전기 열풍기, 심야 전기보일러, Induction heater, 전기 목욕탕, 일본의 All 전화(電化)주택까지, 전기가 가스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말해주는 시대다. 

 전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드니, 연료도 목재-석탄-기름-가스-태양광-풍력-파력-조력- 수력-원자력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 모두가 추울 때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음식 익혀서 먹고, 책을 읽고, 어두운 데서도 일을 하고 공장을 돌리기 위한 삶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삶은 불 때기다.

앞으로 문명이 더욱 발달한다면, 인류의 궁극의 생활에너지는 무엇이 될까? 

세일가스-가스 하이드레이트-무려 섭씨 1억도의 핵융합 등등이 계속 개발 중이다. 뭐니 뭐니 해도 최후의 승자는 아마도 전기가 되지 않을까? 결국 전기가 그 많은 것들을 퇴출시킨 장본인이 된다는 말이다. 

평생 그 전기를 만들던 내가 ‘삶의 불때기’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해 추억을 갖는 만큼, 미안한 마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이 그립다.

1967년, 만 스무 살에 전기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해서 38년 간 대부분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에서 일했고, 퇴직 후에도 16년 동안 전기와 관련된 회사에서 일하면서, 빛도 만들고 불도 만들고 열도 만들고, 동력도 만들고, 다시 말해 ‘전기를 만들면서’ 평생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2022년 12월 현재

   미국 에너지부 산하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과학자들은 최근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 투입된 에너지보다 생산된 에너지가 더 많다는 뜻의 ‘순(純) 에너지(net energy gain)’를 얻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데 2.1MJ(메가줄)을 들여 2.5MJ의 에너지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순 에너지인 0.4MJ을 온전히 전력 생산에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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