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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8. 2022

보령군 성주사지(聖主寺趾)

보령군 성주사지(聖主寺趾) 

   1996


   오늘을 살고 있는 보령인으로서 임진왜란의 모진 국난에 잿더미가 되어 탑만 몇 기 남은 성주사의 조속한 복원을 바라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성주사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기도 하지만, 日本文化의 源流인 오합사(烏合寺)가 성주사의 前身이어서 日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점, 일만여 평의 광활한 땅에 위엄을 자랑하던 대가람, 왜구를 무찌를 수만 명 승병을 양성하던 호국불교의 요람 등으로 보령인의 가슴 마다 자부심으로 남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 타버리고 터만 남은 성주사에 도착하면 무엇보다 먼저 자연풍광의 부조화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저 서기(瑞氣)어린 성주산의 아름다운 소나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절터 앞쪽을 흐르는 탄광에서 나오는 시커먼 물, 군데군데 파헤쳐진 산허리, 가난에 찌든 판자집들이 외로이 서있는 네 기의 탑과 함께 쓸쓸한 저녁을 맞이하는 광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때는 이 터 앞쪽 산 중턱에 있는 백운사(白雲寺)의 모종(暮鐘 보령8경의 하나)과 어우러진 이 성주사의 중생제도 법력(法力)은 가히 선문9산(禪門九山)의 위력을 떨쳤을 것으로 이 터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인구가 많지 않았던 그 옛날에 이러한 대규모 사찰이 여기 있어 일본문화의 스승으로 자리잡았다든지, 4만 명에 달하는 승병을 양성한 애국심은 이 지방의 文化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첩첩 산골에 절만 뎅그라니 세웠을 리 없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이 수련이나 교류 등으로 드나들어 문화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특히 성주사와 연계되어 서해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는 보령시 오천면 선림사(禪林寺)는 당나라를 오가는 스님들이 유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어, 국제교류에도 큰 몫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돌밭, 자갈밭은 있어도 ‘그릇 밭’은 없을 것이다. 절 터 안 옹기터가 있었음직한 이곳 그릇 밭에는 기왓장, 옹기, 토기, 자기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다. 천년을 묵었을까? 아니면 5백년을 묵었을까? 세월을 말하지 않는 이 그릇 파편들은 나그네의 마음을 조각조각으로 깨어 놓는다. 밭 가의 돌담과 절터의 모든 담장은 ‘기와 돌담’이다. 돌담에 기와지붕을 입힌 것이 아니라, 돌 틈새마다 기와 조각으로 공간을 메꾸고 있어서 해본 소리다.


   무염대사 즉 ‘낭혜화상’의 업적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우리나라 국보 제8호다. 신라 당대의 문필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낭혜화상을 위해 지은 이 비석의 글은 名文중의 명문이고, 최치원의 후손 중 가세가 번창한 이 있어 선생의 위업이 빛나도록, 성주사 경내가 아닌 바깥에 별도로 ‘최치원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최치원 신도비는 성주사 뒤편에 있는 산 아래에 길게 날개를 펴고, 마치 무엇을 압도하듯 넓은 터에 세워져 있다. 

   비석의 前面에 새긴 굵고 힘찬 글씨는 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당시 세력가들의 이름이 줄줄이 새겨져 있지만, 그 비석 앞으로 버려져 있는 절터는 가련하기만 하다. 그런 세력으로, 신도비 터를 만들 힘으로, 그 때 성주사의 복원을 시작했더라면 이 신도비도 더 빛났을 텐데, 그들의 영화도 다 스러져버린 오늘 권력과 세월의 무상함을 또 한 번 느끼게 한다.


   그러나 누군들 복원을 바라지 않는 이 있을까! 이제 서서히 시작하는 ‘백제문화권 개발’에 기대를 걸자. 쌀 씻은 물이 웅천 바다까지 흘렀다는 거창함까지야 복원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金堂과, 三千佛殿, 回廊 그리고 中門 등 하나 하나 해 나가야 한다. 조상들에게 좋은 후손이 되자.

   비문을 탁본하는 손길마다 경외스러움으로 차게 하고, 절을 찾는 손님에게도 꿈을 심어드리자.

이제는 꼬마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절터. 그래도 억세지 않은 보드라운 풀이 나 있어 뜀박질이며 말뚝박기며 뒹굴기를 하고 있다. 가난한 생활을 해도 언니 동생들과 사이좋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은 풍요한 도시 유복한 가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순박함과 천진성이 있었다. 

“착하고 고운 것은 좋은 것이지. 그러니 너희들이 이곳을 지켜야 해. 이 절을 다시 세워야 할 것 아녀….” 


*2022년 현재 성주사지 모습

 보령군은 시로 바뀌었다. 성주사지 앞 개울물이 검지 않고 맑아진 것도 오래됐다. 더 이상 이 부근에서 석탄을 캐지 않으니. 그러나 내 보령 떠난 23년이라, 백제문화 복원에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그 때 모습과 똑같아서 놀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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