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노릇
1997년
아침 7시 30분.
잠자리에서 겨우 눈을 뜨는데 마누라 잔소리와 아이들 등교준비 투정소리에 집안은 온통 반 전쟁판. 참말로 억지로 일어나 입 안에 고인 냄새 닦아내고서 우유 한 컵 마시면 작은 마누라 집에 들어간다. 아 그 왜 있잖아? 작은 마누라 집 말이야.
좌변기 물 내리려 레버를 틀면 싸아악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모든 게 빨려 들어가고 새하얗고 깨끗한 사기에 다시 고이는 물을 볼 때 그 참 시원하쟤. 볼 일 보고 나가면 마누라가 마구 뭐라해도 나는 꼼짝 못한다.
“남 밥 먹는데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말 너무해요.”
“.................”
7시 45분.
아이들 등교하려면 7시 50분 차는 타야 하는데, 한 녀석은 아직도 엄마가 갈아입고 가라는 바지 안 갈아입으려고 칭칭거린다. 아니 한 녀석은 벌써 나갔는지 보이지 않네. ‘고 녀석 동작도 빠르지’ 하고 기특하게 여기는데, 웬걸 “콰당당!” 문이 여닫히더니,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로 뛰어 들어오면서 급하게 소리친다.
“엄마! 내 준비물 준비물 어딨어? 어? 아빠! 어제 집에서 잤어? 나 돈 백원만.” 하고 그 바쁜 가운데서도 손을 내민다. 어린 애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잽싼 동작과 머리 회전이 얼마나 귀엽고 기특하고 순발력 있어 보이는지, 엊저녁 고도리치다 남은 동전 한 닢 쥐어 주며, “야 임마! 버스 떠나 빨 리가!”.
그래 이 맛에 돈 버는 거지 뭐....
7시 55분.
양말 찾아 꿰고, 싫다는 마누라 뺨을 강제로 잡아당겨 뽀뽀하고 뛰어나가면 출근버스는 벌써 만원. 오늘도 서서 가야지 뭐.
저녁에 몇몇 모여서 따따블(카드놀이) 한 판하고 거나해서 들어가면 벌써 마누라는 불 끄고 자고 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녀석들도 잘 자는구나.
걷어찬 이불을 바로 덮어준다.
다음날.
오늘 아침엔 간밤에 마신 찬 맥주 탓인가 왼쪽 배가 싸르르 요동하더니 요기가 발동하길래 얼른 일어나 작은 마누라(?)집에 들어가려니 안으로 문이 잠겨 있는 게 아닌가! 맨날 요 시각은 내 차진데 누가 들어갔을까?
그 때 안에서 뭐라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작은 녀석이 튀어나와 마룻장이 꺼지라고 발을 구르며 “똥이 안 나온다!”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마누라는 밥상머리에 앉아서 태연하게 “내일 가져 가라” 하니, 이 말이 녀석의 애를 더 달군 듯, “선생님한테 혼난단 말이야!”하면서 녀석은 마구 울어댄다. 가만히 보니 버스 떠날 시간은 5분밖에 안 남았는데 똥은 안 나오고, 오늘 안 가져가면 혼나고, 오호라! 채변 문제로구나! 요 녀석 우는 꼴이 선생님 꽤나 무서워 하는군.......
어랍쇼? 마누라도 드디어 쩔쩔매고 있다. 아! 내가 가장으로서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는 정말 무기력한 아빠인가? 그런데 아이고 왜 이리 마렵지?
그렇다! 이런 어려운 때에 내가 교통순경 노릇을 하여 모든 문제를 정리해야 하겠다. 그래서 위대한 家長의 힘을 보여줘야지.
“내가 받아주면 안돼?”라 했더니 울다가 곶감받은 애처럼 이 녀석 울음이 뚝 그치고 마누라의 얼굴엔 안도가 스친다.
작은 마누라집엔 바닥에 헌 신문지가 깔려 있고, 성냥 알갱이 몇 개, 작은 비닐봉지에 이름 적힌 봉투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거시기를 받아 들더니, 오늘은 “돈 백 원만” 소리도 없이 튀어나간다. 아내가 시원한 웃음을 웃는 걸 보니 아빠 노릇 한번 멋지게(?) 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오늘 아침 출근 땐 저항없이 뽀뽀뺨을 대주겠거니 생각하니 갑자기 배설의 쾌감이 더욱 짜릿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