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8. 2022

아빠 노릇

아빠 노릇

 1997년


   아침 7시 30분.

   잠자리에서 겨우 눈을 뜨는데 마누라 잔소리와 아이들 등교준비 투정소리에 집안은 온통 반 전쟁판. 참말로 억지로 일어나 입 안에 고인 냄새 닦아내고서 우유 한 컵 마시면 작은 마누라 집에 들어간다. 아 그 왜 있잖아? 작은 마누라 집 말이야. 

   좌변기 물 내리려 레버를 틀면 싸아악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모든 게 빨려 들어가고 새하얗고 깨끗한 사기에 다시 고이는 물을 볼 때 그 참 시원하쟤. 볼 일 보고 나가면 마누라가 마구 뭐라해도 나는 꼼짝 못한다.

“남 밥 먹는데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말 너무해요.”

“.................”


   7시 45분.

   아이들 등교하려면 7시 50분 차는 타야 하는데, 한 녀석은 아직도 엄마가 갈아입고 가라는 바지 안 갈아입으려고 칭칭거린다. 아니 한 녀석은 벌써 나갔는지 보이지 않네. ‘고 녀석 동작도 빠르지’ 하고 기특하게 여기는데, 웬걸 “콰당당!” 문이 여닫히더니,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로 뛰어 들어오면서 급하게 소리친다.

“엄마! 내 준비물 준비물 어딨어? 어? 아빠! 어제 집에서 잤어? 나 돈 백원만.” 하고 그 바쁜 가운데서도 손을 내민다. 어린 애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잽싼 동작과 머리 회전이 얼마나 귀엽고 기특하고 순발력 있어 보이는지, 엊저녁 고도리치다 남은 동전 한 닢 쥐어 주며, “야 임마! 버스 떠나 빨 리가!”.

그래 이 맛에 돈 버는 거지 뭐....


   7시 55분.

   양말 찾아 꿰고, 싫다는 마누라 뺨을 강제로 잡아당겨 뽀뽀하고 뛰어나가면 출근버스는 벌써 만원. 오늘도 서서 가야지 뭐.

   저녁에 몇몇 모여서 따따블(카드놀이) 한 판하고 거나해서 들어가면 벌써 마누라는 불 끄고 자고 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녀석들도 잘 자는구나. 

걷어찬 이불을 바로 덮어준다.


   다음날.

   오늘 아침엔 간밤에 마신 찬 맥주 탓인가 왼쪽 배가 싸르르 요동하더니 요기가 발동하길래 얼른 일어나 작은 마누라(?)집에 들어가려니 안으로 문이 잠겨 있는 게 아닌가! 맨날 요 시각은 내 차진데 누가 들어갔을까?

그 때 안에서 뭐라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작은 녀석이 튀어나와 마룻장이 꺼지라고 발을 구르며 “똥이 안 나온다!”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마누라는 밥상머리에 앉아서 태연하게 “내일 가져 가라” 하니, 이 말이 녀석의 애를 더 달군 듯, “선생님한테 혼난단 말이야!”하면서 녀석은 마구 울어댄다. 가만히 보니 버스 떠날 시간은 5분밖에 안 남았는데 똥은 안 나오고, 오늘 안 가져가면 혼나고, 오호라! 채변 문제로구나! 요 녀석 우는 꼴이 선생님 꽤나 무서워 하는군.......

   어랍쇼? 마누라도 드디어 쩔쩔매고 있다. 아! 내가 가장으로서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는 정말 무기력한 아빠인가? 그런데 아이고 왜 이리 마렵지? 


   그렇다! 이런 어려운 때에 내가 교통순경 노릇을 하여 모든 문제를 정리해야 하겠다. 그래서 위대한 家長의 힘을 보여줘야지.

“내가 받아주면 안돼?”라 했더니 울다가 곶감받은 애처럼 이 녀석 울음이 뚝 그치고 마누라의 얼굴엔 안도가 스친다.

   작은 마누라집엔 바닥에 헌 신문지가 깔려 있고, 성냥 알갱이 몇 개, 작은 비닐봉지에 이름 적힌 봉투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거시기를 받아 들더니, 오늘은 “돈 백 원만” 소리도 없이 튀어나간다. 아내가 시원한 웃음을 웃는 걸 보니 아빠 노릇 한번 멋지게(?) 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오늘 아침 출근 땐 저항없이 뽀뽀뺨을 대주겠거니 생각하니 갑자기 배설의 쾌감이 더욱 짜릿해 올랐다.



작가의 이전글 보령군 성주사지(聖主寺趾)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