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놀러 온 엄마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보니 그녀가 거실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란 책이었다. 제목이 맘에 들었을까? 왜 하필이면 저 책을 보는지 나는 엄마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엄마의 책 보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책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당신의 이야기라 더욱 공감이 됐을까?
그녀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을 책장을 넘기며 미동도 없이 30분 넘게 책을 보았다.
나는 엄마가 책 보는 모습이 신기해 말을 걸었다.
"엄마, 무슨 책을 그렇게 오래 본 데에."
엄마는 책을 보다 말고 소파에 있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책을 좋아했어야. 계집애가 무슨 책이냐며 아버지가 자라고 방 불을 꺼버리면, 이불속에서 달빛에 책을 비춰가며 몰래 동틀 때까지 봤지. 잠도 못 자고 밤새 책을 봐도 다음날 피곤한지도 몰랐어야. 얼마나 재미있었다고."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쭉 내밀고 투정하듯 말하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문득 엄마의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속 아이였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단발머리를 하고는 하얀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얼굴이 지금 엄마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엄마는 그토록 좋아했던 책을 우릴 키우며 또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이혼 후 4남매를 홀로 키우며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 살았던 엄마의 삶 속에서 책은 사치였겠지, 싶었다. 엄마는 다시 책을 보았고 나는 엄마를 보았다. 책 보는 엄마의 몸 윤곽을 따라 알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몇백 년 된 나무를 볼 때 느껴지는 기운 같은 거였다. 엄마는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을 좋아하니 이 나이에도 책을 보게 되네."
"엄마, 내가 책 좀 구해서 보내줄까? “
이 나이에 무슨 책이냐며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나한테도 줄 책이 있니? “
생각지도 못 한 엄마 말에 나는 울컥했다.
"그럼 아주 많지. 엄마는 어떤 책이 좋아?"
그러고는 엄마를 내 서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는 어떤 책을 좋아할까? 엄마 얼굴이 소녀처럼 수줍어 보였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말했다.
"나는 소설책도 좋고, 책이라면 다 좋아. 어릴 때도 가리지 않고 다 읽었어야."
"엄마, 나는 소설책은 별로 없어. 내가 엄마가 좋아하는 책 더 구해볼게. 일단 여기서 엄마가 맘에 드는 거 골라봐."
엄마는 책들을 쭉 살피더니, '노인과 바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부자의 그릇', '유머가 이긴다', '살며 사랑하며 그리고 배우며'를 골랐다. 더 골라도 된다고 하니 엄마는 뜸 들이다가 낮은 톤으로 말했다.
"이거면 됐어야. 나 죽으면 다 짐 돼." 엄마는 말 끝을 흐렸다. 엄마 말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마, 오래오래 살 거니까 걱정 마셔. 그리고 후에 엄마 손때 묻은 책들 내가 다 가지고 올 거야. 그러니까 맘껏 같고 가."
엄마는 내 말을 듣고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나는 엄마에게 임후남 작가의 '살아갈수록 인생이 꽃처럼 피어나네요.'란 책을 권했다.
"엄마 이 책, 어르신들을 작가님이 직접 인터뷰해서 쓴 글인데, 나는 이거 읽고 엄청나게 울었어. 엄마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된 책이야."
엄마는 호들갑 떨 듯 말하는 나를 보다가 궁금한 듯 책을 받아 들고는 책 표지에 쓰인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평균 나이 80세, 7명의 우리 이웃 어른들이 이야기."
엄마는 책을 열어 훑어보더니 가져갈 책위에 포개어 놓았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권해주었고, 엄마는 관심 있는 몇 권의 책을 더 챙겼다.
엄마는 갖고 갈 책들을 바라보며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맙다."
다음에 엄마 집에 갈 때 책들과 책장을 싣고 가서 작은 서재를 꾸며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가고 난 후 책 보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전 일찍 노인 일자리에 다녀와서 잠시 쉴 겸 처마 및 마루에 걸터앉아서 책을 볼까? 아니면 저녁 드라마를 보고 나서 씻고 잠자려고 누워서 이불속에서 책을 볼까? 아니면 갯벌에 조개 잡으러 갔다가 바닷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물 빠지기를 기다리며 방파제에 앉아 책을 볼까?
그런데 나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책에 관해 묻지 못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서 갓김치를 택배로 부쳐준다고 하고는 며칠 뒤에 다시 전화해서 갓김치 얘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또 택배로 부쳐준다고 했다.
지난 설에는 4명의 자식들에게 반찬을 준다며 콩 튀긴 거, 새우 말린 것, 장아찌 등을 4개의 봉지에 나눠서 싸주고는 10분 정도 간격으로 반찬을 넣다가 빼다가 하며 챙겼다. 생전 야무지고 흐트러짐 없었던 엄마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책을 준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책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서 엄마 와의 추억마저 모두 지워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다. 엄마가 일상을 잊어버리다가 나까지 잊어버리면 어쩌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마치며,
제가 유년기 시절 엄마의 나이만큼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나는 친구를 먹을 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아닌,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용서하고 행복을 얘기하려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