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갯벌을 모두 파헤치려나 보다. 엄마는 바다가 좋다며 2년 전 변산 바닷가 근처에 집을 얻었다. 그러고는 갯벌에서 조개를 캔다. 엄마는 당신을 보러 온 나를 데리고 갯벌에 왔다. 엄마가 신던 장화와 여분의 호미를 내 손에 쥐여 주고, 엄마는 운동화를 신고 질퍽거리는 갯벌로 들어갔다.
엄마 옆에서 엄마처럼 조개를 캔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엄마. 엄마는 어느새 멀찌감치 떨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뒷모습. 스판이 들어간 청바지에 남색 체크무늬 남방, 거기에 호주머니가 많이 달린 작업용 조끼. 옛날보다 엄마의 몸이 많이 작아졌다.
어느새 세 시간째다. 바람 부니 갯벌 냄새가 더 비릿하다. 호미 든 엄마 얼굴을 본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미간에 가득한 주름을 보니, 엄마가 조개를 캐는 건지 미련을 캐는 건지 모르겠다. 날카로운 호미로 헤집고 다닌 갯벌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살아온 삶을 그려놓은 것 같다. 엄마 삶의 흔적들이 갯벌 위에 가득했다. 물이 들어오면 갯벌이 흔적 없이 사라지듯, 엄마의 아픈 상처도 모두 쓸어 가면 좋겠다.
엄마는 마흔셋이었다.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는 가끔 집에 왔다. 이혼해 달라며 엄마와 다퉜고, 몸싸움하다 엄마를 때렸다. 이혼은 하지 않겠다던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에 결국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는 날, 아버지가 우릴 데리러 올 거라 했다. 생떼를 써서 새엄마를 쫓아내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4남매만 남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취업한 큰언니는 새벽에 우리들 밥을 준비해 놓고 회사에 갔고, 둘째 언니는 고등 입시 준비로 도서관에 갔다. 초등 6학년인 나와 한 살 어린 동생만 남아 집을 지켰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 기다리던 아버지가 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엄마가 임신해서 힘들다며, 공부해야 하는 둘째 언니만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고, 아버지는 내 졸업식 전날 왔다.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 집에 같이 사는 아줌마가 있어. 오늘 인사하러 갈 건데, 만나면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거여. 아니면 아버지와 살 수 없다.”
아버지 집에 들어서자 검은색 윤기 나는 단발머리를 한 젊고 예쁜 여자가 서 있었다.
“네가 현이구나.”
나도 모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엄...... 마.”
아버지는 엄마와 살던 집에 살림살이를 모두 버렸고,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같이 산 지 1년쯤, 아버지는 출근하고 언니들이 외출한 주말마다 나와 동생에게 계단 청소를 시켰다. 새엄마는 세제를 담은 바가지와 철수세미를 주며, 나와 동생에게 주었다. 3층에는 우리 집, 2층에는 미용실, 1층에는 편의점과 치킨집이 있었다. 3층 계단에 때를 쭈그리고 앉아 수세미로 닦으니 손이 빨개지고 긁혀서 상처도 났다. 2층 계단 청소를 하는 걸 본 미용실 원장님이 미용실 문을 열고 나오며 혀를 찼다.
“에구, 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새엄마가 또 하라든?”
원장님은 남동생과 같은 반 친구 엄마였다. 남동생은 원장님 댁에서 자주 밥도 얻어먹으면서 새엄마에 관해 얘기했다고 했다. 나는 새엄마에게 맞은 게 몇 번 안 됐지만, 남동생은 매일 맞았다. 나무 빗자루로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맞았다. 뺨도 맞았다. 그래서일까, 남동생은 또래보다 키가 작았다. 보다 못한 원장님은 친엄마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알아냈고, 우리의 형편을 엄마에게 고스란히 전했다.
엄마는 양육권 소송을 했고, 우리는 3년 만에 다시 엄마와 살게 됐다.
엄마 나이 마흔여섯, 나는 중3이었다. 엄마는 하고 있던 액세서리 가게를 접고, 방이 6개인 여관을 인수, 숙박업을 시작했다. 재고도 없고 방값이 모두 돈이 된다고 주변에서 권유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새벽까지 손님을 받고 낮에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이불을 빨았다. 여관에서는 낮 동안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다행히 방은 늘 꽉 찼고, 엄마는 같은 일을 반복했다. 여관은 시장 끝자락에 있었다. 농기구 파는 곳에 모여 있고, 앞에 성인극장이 있었다. 뒤쪽에는 쓰러져가는 낡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밤이 되면 고양이가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고1 방학식 날, 일찍 끝나 3시쯤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종소리가 나면 엄마는 카운터 창으로 밖을 봤는데, 웬일인지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카운터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엄마의 등이 보였다. 엄마는 소주잔을 들고 있었고, 소주병에는 술이 반 병 정도 남아 있었다.
엄마가 술을 먹다니. 나는 책가방을 멘 채 그대로 문 앞에 서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순간 엄마의 등이 흔들렸다. 어깨가 흔들렸다. 소리 내서 울 힘이 없는 건지 엄마의 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입술을 꽉 물고, 참았다 내는 엄마의 짧은 신음이 들렸다. 눈물은 흘리고 있을까. 온몸을 쭈그리고 엄마는 몸으로 울었다.
그 뒤로도 엄마는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했다. 화가 났다. 고생하든 말든 아버지 손에 크게 내버려 두지, 왜 데려왔는지.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엄마는 2년 만에 여관을 팔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새로 지은 여관을 샀다. 2년 정도 지나 잘 되던 여관을 내놓고, 노래방과 노래 주점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여관에 대해 탐탁지 않아해서다. 그 해 4남매 모두 대학에 다녔다. 여관이 팔리지 않자 직원을 두고, 엄마는 아등바등 노래방과 주점을 새벽까지 운영하며 학비 마련을 했다. 나는 2년제 대학 졸업 후 공부를 더 하겠다며 편입시켜달라고 엄마에게 사정했다.
“첫 학비만 엄마가 내줘요, 다음 학비는 학자금 대출받고 졸업하면 벌어서 갚을게요.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해서 용도도 벌어서 쓸게요.”
엄마는 결국 허락했고, 집 근처 대학에 편입했다.
대학교 4학년 여름,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잠잘 시간도 없고 밥 한 번 같이 못 먹을 만큼 바쁜 엄마가 웬일일까 싶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엄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엄마의 거칠어진 손이 생선 비늘처럼 꺼끌꺼끌했다. 그래도 따뜻했다. 엄마와의 첫 외출. 좋았지만, 그래도 어색했다. 엄마와 말을 많이 하고 지낸 것도 아니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서먹했다. 나를 화장품 가게로 데리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비쌌다. 뭘 사야 할지도 몰랐다. 엄마는 직원에게 스킨과 로션을 달라고 해서 계산했다. 화장품 가게를 나와 엄마는 옷 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티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골라 입어보라고 했다. 처음 입어 보는 쫄티라 쑥스러웠지만 입고 보니 맘에 들었다.
“우리 셋째 딸, 예쁘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엄마와의 외출이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지고 좋았다. 돌아오는 길 엄마는 내 손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현이야. 그동안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싫었다. 시내에 함께 나온 게 이렇게 좋은데. 필요한 거 사주니 좋으냐고 묻지, 아니면 돈 버느라 힘들었다고 생색이라도 내든 지. 나는 공연히 마음이 뾰로통해졌다.
"이럴 거면 돈으로 주지, 왜 같이 나오자고 한 거야?"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화를 냈다. 나는 엄마와 헤어져서 아르바이트 하던 곳으로 갔고, 엄마는 가게로 갔다.
한 달 후쯤 엄마 가게에 가니, 왠 아저씨와 함께 있었다. 엄마는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저씨라고 소개했다. 잘 지내는 줄 알았던 엄마가 죽으려고 했다니, 깜짝 놀라 물었다.
“얼마 전에 엄마가 죽으려고 수면제를 많이 먹었어. 약 먹고 쓰러져 있던 걸 아저씨가 다 토해내게 해서 살았어. 생명의 은인이야.”
“엄마, 나 두고 죽으려고 한 거야? 그래서 그때 시내 가서 옷 사주고 화장품 사준 거야?”
“어. 너한테 미안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나는 엄마에게 더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엄마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날, 나는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이 바로 엄마가 생을 마치려고 했던 날이라니. 내가 만약 재수하고 편입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빚을 덜 냈을까.
엄마는 바닷물이 갯벌에 차오를 때까지 조개를 캤다. 집으로 돌아가 마당 수돗가에 있는 큰 고무 대야에 쏟아내 조개를 해감했다. 저녁 밥상에 삶은 조개를 냄비째 올려놓고는 뜨거운 국물에 담긴 조개를 하나 집어 준다. 엄마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입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조개를 내 손에 쥐여 주는 엄마. 그러고는 더 빨리 먹을 수 있게 옆에 그릇을 가져다가 조개를 까놓는다. 엄마가 좋아하니, 목구멍까지 가득 차서 더 먹지 못할 때까지 먹었다. 아직도 대야에 가득 남은 조개들.
집안에서도 엄마한테도 갯벌 냄새가 가득했다. 매일 조개를 캐니 엄마네 냉장고에는 언제나 조개가 가득하다. 엄마는 삶은 조개를 건조기에 말린다. 그러고는 자식들에게 나눠준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조개 요리가 끊이지 않는다. 바짝 말려진 조개를 그냥 먹기도 하고, 찌개에 넣어 국물을 내고, 부침개에도 넣는다. 엄마의 조개가 입에 들어가면 짜디짠 바닷물이 눈에 들어간 것처럼 눈물이 흐른다.
결혼하고부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엄마에게 위로받고 싶어, 일주에 한 번씩 엄마에게 전화했다. 처음엔 1분도 긴 시간이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은 기본이 30분이다.
“느그 아버지 땜에 그지 된 거여. 여관 그대로 하게 놔뒀으면 되는데, 가게 한다고 5천만 원 사채 쓴 게 이자에 이자가 붙어갖고 홀랑 다 넘어가 버렸지. 그냥 여관만 했으면 이 모양 이 꼬라지 안됐을 건데, 여관 한다고 니 아버지가 개지랄해 갖고.”
“엄마 힘들었겠어. 가게 세 개를 혼자 어떻게 했대. 나는 도와준 거도 없는데. 그런데도 자식들한테 생색도 한 번을 안 내, 나는 애들이 맛난 거 자기들만 먹어도 서운하던데.”
어느새 지금의 나는 엄마가 자식들을 데려온 엄마 나이가 되었다.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제는 엄마에게 내 등을 내드려야 할 때다. 엄마가 내 등에서 쉬게 하고 싶다. 엄마는 방금 한 말도 잊어버리고 같은 말을 반복하다. 그래도 엄마는 전화를 끊을 때쯤 잊지 않고 말한다.
“바쁠 텐데 엄마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땡전 한 푼도 없는 엄마한테 잘해줘서 고맙고.”
“에이, 돈이 대순가, 나는 우리 엄마가 참 자랑스러워.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다고.”
pp.122- 131 엘리자베스 퀸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의 상실애도 과정
1) 부정 :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내게는 상처가 없다는 환상을 만들어 거짓을 믿는 것이다.
2) 분노 :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부정 같은 방어기제로 더는 억압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깊어지면 '상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3) 슬픔 : 그동안 얼어붙었던 슬픔이 녹으면서 울기시작한다. 아이 때 마땅히 쏟아내야 했던 눈물이다. 그러나 울지 못했기에 슬픔 위에 슬픔이 쌓여 자신이 슬픔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4) 수용 : 수용은 더는 저항하거나 고집 피우지 않고 상처받는 내면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이제 과거의 것을 용서하고, 무엇으로도 상처받을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임을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용서는 남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용서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 자신을 그만 벌주고 실수를 넘겨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