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동안용건 없이 전화한 적이 없었는지무슨 일인지 싶었다. 김치를 담가서 먹을 건지 묻거나, 택배는 잘 받았는지, 김치 맛은 어땠는지 전화해서 묻고는 자연스레 통화로 이어졌었다.
줌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 점심식사를 챙겨주고 한숨 돌리니 2시였다. 엄마에게 전화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번 울리고 엄마가바로받았다.
"다 끝났냐?"
전화를 기다렸나 보다. 엄마에게 뭐 하냐고 물으니 집에 마룻바닥이 썩어서 새아버지가 뜯어내고 고치고 있다 했다. 새아버지 눈을 피해 방에서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엄마의신세한탄이 시작됐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내가 그지 된 거야. 이렇게 암꺼도 안 하고 가만있으면 생각만 해도 승질이 나. 여관 그대로 하게 놔뒀으면 되는데, 다른 가게 한다고 사채 쓴 게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홀랑 다 넘어갔지. 그냥 여관만 했으면 이모양 이꼬라지 안됐을 건데. 니 아버지가 개지랄해가지고 서는.”
“우리 엄마, 고생 많았어. 생각해보니 그때 엄마 나이랑 지금 내 나이랑 같더라고, 나는 엄마처럼 못할 거야. 힘드니까 아이들 아버지한테 보내겠지. 엄마는 대단해. 내가 잘 큰 거 다 엄마 덕분이야.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워.”
"돈 한 푼 없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그럼 얼마나 의지가 되는데."
"너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이러한 말로 엄마에게 위안이 될까.엄마는 친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계속해서 늘어놓는다. 늘 같은 얘기들. 금방 30분이 흘렀다.
엄마와 이렇게 길게 통화를 하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전에는엄마와 통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취업하면서부터 엄마와 떨어져 살았는데 전화를 하더라도 1분을 넘기는 일이 어려웠다. 엄마는 장사로 바빴고, 엄마는 내가 일하느라 바쁘다고 생각했는지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20년 전 취업 후 엄마와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는지 놀라 물었다.전화를 걸어도엄마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엄마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말이 많지 않고 무뚝뚝했다. 입을 꾹 닫은 채 밥을 챙기거나, 미싱으로 옷을 만들거나 하거나, 텃밭을 매거나 했다. 바쁘기도 하고 말수가 없는 엄마와 대화를 도란도란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었다. 그런 엄마 곁을 나는 그저 맴돌았다.
본격적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한건결혼하면서부터다. 남들처럼 편안한 친정엄마가필요했다. 일주일에 한 번 날을 정해 같은 시간에 전화를 했다. 통화시간은 늘었지만, 대화라고 하기엔 일방적인 엄마의 걱정거리들을 쏟아내는 식이였다. 사위가 바람을 피우지는 않을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을 했기 때문에 엄마는 더욱 불안했던 것 같다.
“니 아빠도 결혼 초엔 지극정성 잘했어. 그땐 세상 부러운 게 없었지.”
이렇게 얘기하다가도 아버지가 바람피워 엄마를 힘들었던 얘기로 끝이 났다. 그리고 내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마찬가지였다.
“니 아빠도 전 서방처럼 자식들이라면 껌뻑 죽었어. 바람피우고 그년한테 미쳐서 그렇지. 남잔 모른다. 언제 이혼할지 모르니 뒷돈을 챙겨 놔야 해. 엄마처럼 갑자기 당해서 돈 한 푼 없이 당하면 안 되니까, 지금부터 모아둬.”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 건 알지만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힘들었다. 어느 날부터가 내 꿈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게 엄마 때문일까. 바람피운 아버지 때문일까. 한동안 힘들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은 적도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엄마와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속상했다. 내 맘이 너무 힘들어지면 이런 엄마가 불편하기도 해서 한동안 전화를 안 했다. 이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엄마에게 지지 쳐있었다. 엄마의우울증이 심해서 신세 한탄을 더욱심해졌다. 친아버지에 대한 원망들로 꽉 차고 얼룩져있었다. 엄마와 통화한 날이면 그게 화근이 되어 내가 아이들에게 짜증을내는 날도 있었다. 나도 위험해지고 있었다. 정신적 위로와 안정이 필요했다.
고생 고생하며 자식을 키워낸 엄마를 현실에서 미워할 수 없지만, 글 속에서라도 맘 놓고 원망하고 싶었다. 엄마와 통화를 거듭할수록어릴 적 나의 모습들, 힘들어하는아이를 마주하고 보듬으면서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6개월 정도엄마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하자 많이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 눈물이 났다. 운전하다가도, 밥을 준비하다가도, 아이들을 보다가도, 울고 다녔다. 유년기 시절의 나를 만나며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눈가에 눈물을 달고 다녔다. 아파서 더 글을 쓸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원망도 차츰 사그라졌다. 엄마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엄마를 어린아이의 눈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지금 나는 40대 중반인데, 자식 4명을 홀로 키우기 시작한 엄마 나이와 같았다. 나처럼 설익은 엄마였을 턴인데, 젊은 나이에 남편도 없이 여관 일을 하던 엄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4,50대의 시간을 여관에 바친 엄마. 자식들 키우면서도 한 번을 힘들다는 내색 없이 홀로 삯이던 엄마의 뒷모습. 엄마의 주름진 세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을 보내고 난 엄마. 지금 엄마에게 남은 건 뭘까.
엄마에겐 지독했을 친아버지에 대한 상처들, 아픈 줄도 모르고 혹사했던 몸뚱이만 남은 건 아닐까. 참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엄마. 엄마라는 자리가 자식을 위해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자림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버지 흉을 보는 게 전부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란 말도 입에 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자식 탓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렵게 자식들 키워놓고도 자식들에게 용돈 한번 바란 적도 없었다. 이른 살이 넘은 나이에도 신세 지기 싫다며 노인 일자리와 철마다 밤과 사과를 따며 소일거리를 한다.
엄마가 통화를 마치려고 한다.
“너랑 수다 떨고 나니 좀 났다.”
“엄마가 괜찮다니 나도 좋네. 나도 코로나로 밖에도 못 나가고 심심해. 엄마 언제든 전화해.”
전화를 끈고 보니 엄마가 ‘수다’라고 했다. 엄마와 친구가 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설레었다
엄마가 나를 의지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리고 수다라는 말에 희망이 보였다. 엄마의 깊은 상처가 수다를 떨고 나면 툭툭 털어지는 가벼운 거리가 될 수 있겠다. 그럴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바라본다.
내가 품고 있는 엄마에 대한 미련이 아픔이 되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엄마를 쓴다. 글 속에서 엄마를 다시 만난다.
행복한 삶을 선택하기 위한 16가지 조언
1. 변화를 원한다면 나를 인정해야 한다.
변화는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겨났는지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시간이 약이 안 되는 트라우마 상처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이 날 것 그대로 남아 현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의 내 양분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3. 증상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
아무리 애쓰고 달아나려고 해도 과거의 감정이 올라오고 내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다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지금 느끼는 고통은 내가 이상한 탓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모의 행동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보려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계속 애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혼란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5, 어린 시절 상처 부인하지 않기
이제 어른이 되었다면 두려워서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섭고 두려웠던 과거의 감정을 안전하게 잘 느끼고 흘려보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부모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
생각의 초점은 '부모가 왜 나에게 이렇게 대했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그 아이의 경험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비난과 자책의 목소리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7. 바꿀 수 있다는 환상 바뀔 거라는 기대
내가 원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부모의 인정을 여전히 고대하며 나를 가두기보다 이제는 내가 나를 인정하고 격려해 주면 됩니다. 어른으로서 내가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8. 부모의 감정은 내 책임이 아니다.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려 노력하고,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여 조언하는 일은 더 이상 내 역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자 대신 뛰어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9. 혼자 견디기보다 도움을 청해도 좋다
어린 시절의 고통이 지금의 나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함께할 동반자를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것은 친구이거나 상담자일 수도 있고, 믿을 만한 또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10. 변화의 시도, 하나의 실험과도 같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더 멀리 갈 수 있음을 체험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럴 때 우리는 믿기 어려울 만큼 몸과 에너지를 새롭게 쓸 수 있고 자유롭게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11.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다
내 몸에 오랫동안 스며 있는 태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당신의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이 알 수도 있습니다.
12. 당신은 이미 부모 세대와 다르다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은 이미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13. 작은 것이라도 성취하는 경험
과거와 다른 자신만의 성취 경험을 얻게 되면 이것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4. 운전석에는 어른이 된 내가 앉아 있다
내 안에 고통스러운 감정의 응어리가 표현되지 못하고 눌려 있을 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시로 내면의 어린아이가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습니다. 어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던 그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15. 불행과 행복은 공존할 수 있다
지금의 고통과 불행이 완전히 없어져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이나 문제에만 초점을 두고 주목한다면, 우리는 우울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16. 이미 당신 안에 있는 치유의 힘
트라우마를 회복한다는 것은 치료자가 정한 답을 향해 내담자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