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May 15. 2021

엄마의 유서

상처 하나.


초등학교 5학년, 엄마 마흔두 살



엄마의 서랍 속에는 빨간색 양장으로 된 혼인서약서가 있었다. 그것은 A4 정도 크기였고 그 안에 종이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떠한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남편 000은 아내 000을 아끼고 사랑하겠습니까?'라고 적혀있었고 맨 아래 엄마와 아버지의 자필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좋았다. 심심할 때면 그것을 가끔 꺼내 보면서 읽고 가슴에 품고 있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이였다. 아무도 없던 집에서 엄마 서랍에서 혼인서약서를 꺼내는데 다른 때와 다르게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하고 보니 여러 장의 종이에 또박또박 쓰인 엄마의 글씨가 보였다.


첫 장에 '유서'라고 제목이 적혀있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글을 읽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유서? 엄마가 죽으려는 건가?' 불안한 마음에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당신을 아직도 사랑합니다. 당신이 옆에 없는 깊은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집에 오지 않은지 벌써 여러 달 지났습니다. 밖에 나는 차 소리에도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봅니다. 혹시 당신일까 싶어. 보고 또 내다봅니다.'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쓰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가며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당신은 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내가 연탄가스를 맡고 죽어갈 때 당신이 나를 발견해서 업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죽었겠지요.

결혼하고 나서도 폐결핵으로 병원에서 얼마 남지 않아 가망이 없다며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을 때, 당신은 나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며 간호사에게 주사를 놓는 법을 배웠지요. 힘없이 누워만 있던 나에게 당신이 매일 3번 주사를 놔주던 것을 기억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눈물이 계속 흐르고 또 흘렀다.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마저 읽었다.


'당신 없이는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미워서 바람이 난 거면 내가 죽어 없어져 줄 테니, 죄 없는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합니다. 내가 잘못이 있다면 당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 덕분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많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엄마의 유서를 손에 들고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눈물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방 안에서 울고 있을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혼인서약서 안에 다시 엄마의 유서를 넣고는 서랍에 재빨리 넣었다. 그리고 방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그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들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배가 아파졌다. 그날 저녁 먹은 것이 심하게 체해서 엄마는 내 열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늘로 땄다. 바늘로 찌르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엄마가 죽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는 수면제 반 통을 먹었다. 천만 다행히 상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결혼서약서를 보았을 땐 유서는 사라졌, 엄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거뭇한 기미로 뒤덮이고 있었다.





이러한 어릴 적 기억을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섬광 기억이란 어떤 사고나 사건 등과 같이 자신의 감정에 큰 영향을 준 것들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비상 상황이나 죽음과 관련된 긴급하고 중요한 부분들을 두뇌가 기억하여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광재, 이미지설교, 디사이플, 2020,p.120


삽화 기억이란 서술 기억의 한 형태로 경험에 기반한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이며, 자신이 특별한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기억이다. 이러한 삽화 기억은 자신의 경험한 것이나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광재, 이미지설교, 디사이플, 2020,p.191



이전 02화 유년기 상처 마주하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