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에 응어리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생각만 하려 해도 명치가 조여옴이 느껴졌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를 등지고 있던 엄마의 등이떠올랐다. 평생 봐온 엄마의 얼굴이 왜 생각이 안 나는 건지...
단단한 엄마등만 떠오르는 건지.,
문득문득 생각나는 어린 시절 상처와 마주해야 할 때면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잊고 살려고 발버둥 쳤다. 그때처럼 다시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서 상처가 곪아 터지든 말든 덮어버렸고몸을 더 바쁘게 움직였다.더 많은 일을 해서 일 중독자를 자처하며상처가 무뎌지길 바랐다.
그런데 결혼 후 엄마가 되고아이들과의 마찰을 겪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릴 적 상처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들에게 까지 힘들게 하고 있었다. 심리상담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만 없었다.
더 이상 내가 주는 상처로 인해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단단한 엄마의 등만 보고 자랐던 나의 유년기 시절의 과거를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나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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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내면 아이는긴 세월 어둠 속에 웅크려있었다.
30여 년 그렇게 굳어져 지내던 아이는 조금만 건드려도 울부짖으면 때를 썼다. 그 아이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손톱을 뜯거나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엔 8살 아이도, 11살 아이도, 14살 아이도 20살이 넘은 아이도 있다. 내 아이의 울음 속에, 어릴 적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쓰다 보니 잊을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일들이 생생히 기억나는 게신기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나는 어떻게 감당했는지. 한동안 멍해있기도 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경직돼 있는 아이의 모습이 성인이 된 지금의 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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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쓰고 나면 한동안눈물을 달고 살았다. 밥 먹다가도, 운전하다가도, 걷다가도, 아이들을 안아주다가도 눈물이 났다. 그쳤는가 싶으면 또 울었다. 눈물이 날 때마다 기댈 곳 없이 외로웠던 나를, 어른이 된 내가 안아주며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내 눈물로 내면아이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었다.
글을 쓰고도 아직 아직 앙금이 남았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어두운 터널을 내 발로 걸어 나오게 된다면,우리 가족들도, 나와 같은 일을 격은 그 누군가도 두려움에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만 보는 글로 쓰다가 유년기 시절을 힘들어하는 친정식구들과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나의 아픔을 공유한다. 그래서누군가에게도 힘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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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부터는 그 당시 사건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묘사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린 시절 아픔을 생각하면 조각처럼 기억이 나는 그때의 일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들을 쓰고 나이순으로 글을 정리했습니다.
엄마의 유서, 아버지의 부적, 새엄마의 학대, 엄마의 폭력, 아버지와의 추억, 엄마가 죽으려고 했던 그때, 제 결혼식의 아픔들을 썼습니다. 이후는 치유되는 과정의 글입니다.
자신의 혼란을 대면할 수 있게 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의 층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 고통은 매우 불편하고 도발적이어서 자아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피하는 데에 삶을 바쳐 왔다. 당신의 온 인격이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키워온 사고와 신념과 행위와 존재 방식 위에 형성되었다. pp.168-169, 상처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A. 싱어, 라이팅하우스 중에서
엄청난 저항을 느낄 것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그토록 강력한 것이다. 힘을 빼고 저항을 하면 가만히 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가슴은 도망가서 문을 닫고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려고 할 것이다.
계속 이완하라. 어깨와 가슴의 힘을 빼라. 고통을 놓아 보내어 당신을 지나가도록 공간을 내주어라. 그것은 단지 에너지일 뿐이다. 그것을 그저 에너지로 바로 놓고 놓아 보내라. pp.174-175, 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A. 싱어, 라이팅하우스 중에서